🔖 앞서 언급한 책에서 최태현은 야생지역 보존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문장, ‘인간의 마음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을 인용한다.
나는 이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커뮤니티》의 하마를 통해 이해했다. 하마의 마음에 타인을 들일 공간, 즉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 있다는 게 믿어져서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진정한 동료들이 문제를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냐고. 나의 문제가 개선되는 사이, 누군가의 문제가 악화되는 삶의 역설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마음을 지닌 자는 별 도리 없이 겸손해진다.

🔖 훗날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가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백인 남성주의적 세계에서 감각을 포착하는 탐색 도구로 일인칭을 활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우리 중 누구도 자신만의 삶을 사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고 썼으나 모든 사건은 개인적인 방식으로 냉혹하게 체험된다는 게 에르노의 생각이다. 다만 책 속의 ‘나는’ 어떤 식으로든 투명해진다면 독자의 ‘나는’도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다고, 그렇게 일인칭은 보편에 도달한다고 에르노는 말한다.

🔖 못난 딸들이 으레 그러듯이 나는 작가로서의 내 결함 (충분히 첨예하지 않음, 유치함, 사유의 길이가 짧음 등) 이 모두 저 여자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물려준 엄청난 단순함과 명랑함이 아주 보잘것없는 장점 같았다.
애트우드에게 보부아르가 있듯 나에게도 있다. 징그럽게 똑똑한, 내가 절대로 쓰지 못할 문장을 쓰는 동료 작가들이. 그들은 시시각각 나를 작아지게 한다. 그러나 《타오르는 질문들》을 선물하고 보부아르에 대한 애트우드의 헌사를 소리 내어 읽어준 것도 살아 있는 동료들이다. 그들을 선망하고 두려워하면서 배웠다.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 양쪽 다 글감이 된단 걸. 문학에선 풍요와 결핍을 무 자르듯 나눌 수 없단 걸. 나는 엄마의 생명력 덕분에 작가가 되었단 걸.

🔖 문학은 오랫동안 인간의 강인한 면뿐 아니라 약한 면을 아주 소중히 다뤄왔어요. “도대체가 번거롭게 사랑과 우정을 왜 해야 돼?”라는 질문은 “도대체 번거롭게 문학을 왜 읽어야 돼?”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저의 목구멍에서 직관적으로 이런 대답이 튀어나오네요. “그야… 안 하면 모르니까”라는 대답이요.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공들여 읽지 않으면 영영 모를 세계가 있지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기가 쉽고요. 하지만 어떤 사람을 깊이 좋아하고 사랑할수록 그에 대해 간단히 함부로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잖아요. 헤아리게 되면 차마 그렇게는 못 내뱉겠는 말들이 생기고요.
그런 점에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사랑과 우정을 깊이 경험하는 일과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고작 자기 자신으로만 살다 가요. 나 아닌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 어려운 시도를 계속하는 게 문학의 도전이죠. 실패했든 성공했든 간에, 대부분의 책에는 모르는 삶을 최대한 섬세하게 헤아리려는 흔적들이 담겨 있어요. 김애란 작가님은 “‘모름’의 렌즈로 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쓰셨어요. ‘너라면 어떻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관두지 않는 성실함이 사랑하는 자와 쓰는 자와 읽는 자가 공유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