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오 년 전에 저는 무슨 말을 어느 자리에 갖다 놓아도 그 말이 생생하게 살아 있지 못하고 힘없이 축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줄곧 바라보던 끝에, 시를 끼적이는 걸 그만두고 S시를 떠나 이곳저곳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영혼을 구할 단 한 마디의 빛나는 표현을 건져낼 수 있다면 돌아와서 꼭 다시 시를 쓰지 않아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짧지 않은 기간에 걸쳐 얻어낸 결론이라곤 말에는 처음부터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말로써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무언가는 자꾸만 어디로 달아나거나 때론 아주 사라지기를 반복했거든요. 그동안 저는 이미 있는 말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걸 뽑아가지고 이미 있는 대상물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실은 있으면서도 없는 무엇을 없으면서도 있는 말로 그려내기 위해 수많은 말을 버려야 했는데도요. 말은 무언가를 분명하게 가리키거나 정의하는 대신 무언가하고의 관계를 이었다 끊었다 하며 그 관계라는 것에 생명줄을 부지하고 있기에 언제나 임의적이고 괄호로 남아 있는 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일 따름인 데다 입 밖으로 나와 괄호를 채우는 순간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차피 영원한 괄호가 될 테니 차라리 비워두는 게 완성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괄호란 언제나 무언가로 채워야 의미가 있는 것이더군요. 그 채움으로 발생하는 끝없는 오류의 반복이야말로 말이 존재하는 이유였던 겁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미농지 같은 미소
조장기
그래서 너는 그 새떼와 긍정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는데?
저도 뭐 별로. 그냥 유목 민족의 믿음처럼, 뜯어 먹힌 영혼들이 하늘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갔으면 좋겠다, 정도? 뜻밖에 그 애의 대답은 피안에 닿아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새들의 배 속에 담겨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걸 자유라고 생각할 만큼 이 아이는 바닥에 깊이 처박혀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고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자장가
“너 고문이 뭔지 알기는 알아?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나에 대한 고문이야. 깨어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거. 하루는 스물네 시간이고 인생은 길어야 팔십 년인데 너는 그중 몇 년 동안이나 나를 쓸모없는 쓰레기로 만들고 있어. 네가 지금 붙들고 갖은 염병을 떠는 그 쓰레기차, 나를 거기 처박아버린 게 너야. 나는 재활용이나마 되려고 이 짓을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