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처럼 상품 교환의 논리가 일반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당연한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 당연한 경향을 그대로 두면 사회의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상품 교환의 논리가 가족관계를 완전히 지배하면 가족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국가와 시민의 관계가 서비스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로 규정되면 국가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모든 가치가 화폐의 액수로 환산되는 곳에서는 양적 측정이 불가능한 가치, 즉 인간의 가치를 다룰 수 없게 된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이렇지 않은가? 이 사회가 인구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 결과다.
🔖 지금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믿음 중 하나는 나의 행위와 그 대가 사이에 등가관계가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타인에게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하면 그에 해당하는 것을 다시 받아야 하며, 피해를 보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거나 가해자에게 같은 피해를 주어야 한다. 행위와 대가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 완료되지 않은 교환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 상품 교환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양적으로 측정하는 것처럼, 공정 역시 양적 측정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 시험 성적이라는 양적 지표로 검증된 것만이 능력으로 인정될 수 있고, 그 성적은 양적 보상과 교환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한국식 공정이란 시험 성적과 소득이 등가교환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사전적 의미의 ‘공정’이나 ‘fairness’와는 전혀 다른 말이다.
🔖 강력한 처벌에 대한 집단적 요구는 꽤 독특한 현상이다. 명확한 의미도 없고 현실의 문제에 대응하지도 못하는데, 많은 사람이 계속 그것에 집착한다. 이것이 가해자-피해자 도식의 주요 효과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하고 나면 개인 사이의 부채관계만 남고,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징계하는 것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 내 ‘갑질’과 따돌림을 성토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노동법, 기업 조직과 문화, 노사관계, 위계적 사회관계의 문제를 고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이른바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강력한 처벌과 가해자 신상 공개를 요구했다. ‘어떻게 이런 온라인 집단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그런 폭력이 발생하는 환경과 구조를 이해하고 바꾸려는 시도 역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후에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집단적 분노는 놀라울 정도로 허약해졌고, 공동체는 여전히 이런 종류의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른다.
🔖 그러므로 통속적 복수극을 향해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모든 인간적 가치는 고유한 것이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은 등가교환될 수 없으며, 가해자에게 어떤 고통을 주어도 훼손된 인간적 가치를 상환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강력한 처벌’로 부채를 청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현실이 픽션처럼 다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대중은 관객이 된다. 시청자가 복수극 드라마를 보듯 대중이 현실의 폭력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관객의 심리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고통이 등가교환되는 것처럼, 현실의 고통도 대중의 심리 안에서 등가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가해자-피해자 도식의 숨겨진 작동 방식이 드러난다. 사실 폭력에서 비롯한 부채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와 분노한 대중 사이에 형성된다. 이는 감정의 부채다. 대중은 가해자의 행위에서 감정의 피해를 보고, ‘강력한 처벌’을 통해 감정적 보상을 받으려 한다. 만일 이것이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부채였다면, 처벌이 부채를 청산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통속적 복수극에서 피해자의 존재가 잊히는 것처럼, 현실의 가해자-피해자 도식 역시 피해자의 존재를 삭제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항상 가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폭력은 청산 불가능한 부채를 남긴다. 폭력이 대중의 마음속에 남긴 심리적 효과는 청산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어떤 것도 폭력이 훼손한 인간적 가치 그 자체를 보상할 수는 없다. 이 사라지지 않는 부채를 관리하는 것이 공동체의 역할이다. 폭력의 구조와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공통의 법 원리에 기초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미래의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는 등 공동체는 그 부채를 관리하기 위해 수많은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해도 부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이동하며 무한한 요구를 남기고, 이것이 공동체의 영속적 존재 이유를 제공한다. 공동체community란 공통의 것common을 공유하는 집단이고,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공통의 부채다. 공동체 내부의 폭력은 구성원 사이를 돌아다니는 공통의 부채를 남기고, 이 부채를 함께 관리함으로써 공동체가 유지된다.
지금 한국을 지배하는 가해자-피해자 도식은 청산 불가능한 부채를 청산해보려는 헛된 집착이다. 나는 이런 집착이 상품 교환 논리의 확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 빌린 돈을 받고 채무관계를 정리하듯 폭력의 부채관계를 손쉽게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가? 가해자가 강력히 처벌받으면 그것으로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발상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 이제 우리 모두 자문해봐야 한다. 내가 꿈꾸는 것은 평등한 세상인가, 평등하지 않은 세상인가?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내 아래로는 불평등하고 내 위로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아래를 향해서는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고 말하고, 위를 향해서는 ‘세상은 평등해야 한다’고 외치는 게 지금 한국의 상식 아닌가?
부자 되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원칙을 망각하기 위한 노력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사회구조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하다. 불평등 개선이나 완화가 아니라 평등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있을 때만 한국을 더 인간적인 곳으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
🔖 이민 정책의 가장 기초적인 규칙은 차별 금지다. 이 규칙이 명확히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애초에 이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적 그룹 사이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그중 인종차별을 진지하게 다루는 사람은 드물다. ‘외국인 가사 근로자 도입’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있지만, 차별금지법을 추진하는 정치인은 없다. 차별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법률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서 대규모 이민 정책 운운하는 것은 실로 웃기는 일이다.
인종차별에 침묵하면서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이들의 속내는 뻔하다. 이민자를 사람이 아니라 노동력 상품으로만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으로만 취급받는 인간을 우리는 ‘노예’라 정의한다. 그들은 새로운 시민을 맞이하고픈 것이 아니라 ‘외국인 노예’를 수입하고 싶은 것 아닌가? 한국의 이민 정책은 여전히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결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이성 커플과 동성 커플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따라서 정치적 논쟁의 합리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곳이라면, 동성결혼에 관한 논쟁은 필연적으로 법제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동성결혼 인정 여부가 민주주의 발전의 척도처럼 간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그 답은 근대 민주주의가 정치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구별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모든 개인은 평등한 시민으로서 공동체의 삶에 동등하게 참여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다른 모든 개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 이러한 구별은 해소 불가능한 여러 문제를 남기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인간 사이의 사회적·경제적 차이들이 시민의 정치적 평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개발해왔다. 인간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하고, 사회적 권리들social rights을 인정하고, 노동계약을 법적으로 규율하고,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는 것 등이 바로 그 장치다.
2부의 앞선 글들에서 다양한 사례를 분석했듯, 한국의 국가와 시민들은 평등을 위한 노력을 노골적으로 포기해왔다. 소득과 자산, 고용 형태, 교육 수준, 거주 지역과 형태, 성별과 성 정체성, 인종, 신체 조건 등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이는 곧바로 정치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공동체의 운영을 주도하는 것은 부자, 정규직 노동자, 주택 소유자, ‘일류 대학’ 졸업자, 서울 거주자,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비이주민 등이고, 나머지는 정치적 참여에서 멀어진다. 모두가 1인 1표를 행사한다고 해서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가 점차 분리되고,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아닌 것이 되어간다.
🔖 인민이 인민 자신을 통치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 민주주의 아래에서 인민은 통치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통치받는 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를 구별하는 가장 날카로운 기준이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수립된 근대 정치는 인민의 자기통치를 자유liberté와 평등égalité이라는 원리로 표현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자유’란 그 어떤 시민도 타인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이고, ‘평등’이란 모든 시민이 시민이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의미다. 자유와 평등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하나의 원리로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롭지 않은 시민이 있다면 모든 시민의 평등이 불가능하고, 모든 시민이 평등하지 않다면 모두의 자유도 불가능하다.
(…)
민주주의의 목적에 따른 유형화와 분류는 불가능하다. 인민의 자기통치(또는 자유와 평등)라는 하나의 목적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식 민주주의’의 목적이 인민의 자기통치라면, 굳이 ‘한국식’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 일반의 목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름만 ‘민주주의’일 뿐, 실제로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일 것이다. 따라서 목적의 관점에서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아닌 것이 있을 뿐 ‘한국식 민주주의’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한국식 민주주의’ 따위의 발상이 민주주의 아닌 것을 민주주의로 포장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적 차별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목적에서 곧바로 도출되는 것이다. ‘한국식’이라는 말이 사회적 차별을 묵인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식의 거짓 표현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군사정권은 독재를 민주주의로 포장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산업민주국가’ 따위의 말을 만들어냈다.
(…)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가 지배적 명령으로 인정되는 곳에서 평등의 원리가 이토록 무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다수 시민이 방어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제도일 뿐, 자유와 평등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역사적으로 수립된 현실의 제도를 지키는 데만 관심을 보인다. 민주주의의 목적을 망각하고, 수단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당연히 민주주의 제도를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체제를 ‘반독재’나 ‘비독재’로 규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일은 ‘민주주의’ 개념의 정의를 공동체의 수준에서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 현실 정치의 더럽고 복잡한 문제는 정치인들이 맡고, ‘일반 국민’은 순결한 공간에 남아 명령(혹은 읍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도 온라인 여론을 조직하고 대규모 거리 시위에 참여하지만, 이런 활동 대부분은 본래적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사랑 혹은 증오를 조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런 식의 성역화는 배제의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래서 정치 참여의 고전적 방식, 즉 대안정당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 등은 노골적 조롱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일반 국민은 결코 정치라는 특권층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을 대의민주주의의 일반적 특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이해다. 현대 민주주의는 모두 대의 체제지만,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이 한국처럼 극단적으로 위축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일반 국민과 정치의 극단적 분리는 한국의 고유한 특성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그런 분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정치의 영역에 진입하는 시민이 ‘평범한 사람’의 지위를 차지할 때만 정상화될 수 있다.
🔖 다소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한국에는 사회적 권리에 기초한 사회정책’이 없고, ‘불우이웃 돕기’처럼 시행되는 ‘복지 정책’만 있다. 그래서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의 목적이 서비스 제공인지, 부정수급 방지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서비스 수혜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고, 자신의 가난과 고통을 증명하면서 국가에 시혜를 부탁해야만 한다.
누군가 ‘예산에는 한계가 있는데 뭘 더 어쩌란 말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중요한 질문이다. 바로 여기에 유럽 국가들이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감수하는 이유가 있다. 권리 기반의 사회정책을 운영하면 재정 적자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유럽 국가들은 사회 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수당을 받은 시민의 구직 활동을 강제하거나 낭비라고 판단되는 의료비 사용을 줄이는 등) 재정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데, 한국처럼 ‘선착순 복지’를 시행하는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는 사회적 권리의 보장이라는 사회국가의 목표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독재자를 쫓아내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투표로 뽑으면 그걸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선거제도는 잘 운용되고 있지만, 이 제도를 생각하고 논의하는 데 적합한 헌법 개념은 불충분하다. 투표는 ‘1인 1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정치적 권리의 평등한 보장을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장애인은 여전히 투표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는 공동체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사회관계 일반은 여전히 위계질서의 지배 아래 있고, 모든 개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며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한마디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투표로 선출하는 세상이 왔지만, 그게 전부일 뿐이다. 민주주의 모델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사이의 일관성과 체계성은 무시된다.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려면, 발전과 진보를 단선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구의 산업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이중의 사건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발전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근대화라는 식의 논의 말이다. 이는 일종의 달리기 시합으로 간주되어, 서구가 한국보다 먼저 출발해 앞서가고 있으니 속도를 내 따라잡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최근 20여 년간 한국 자본주의는 급격히 성장했고, 지금은 ‘이제 우리도 서구 선진국 못지않다’는 자부심이 폭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 자본주의의 달리기 시합에서 앞선 주자를 거의 따라잡았다고 느낀다. 근대화란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인데, 전자는 거의 완료되었다고 보는 것이다(물론 정말 그런지에 관해서는 별도의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발전은 어떠한가? 앞선 분석이 보여주는 바는 한국 민주주의가 서구 민주주의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애초에 서로 다른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자신이 서구인을 뒤따라가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분석은 한국 문화가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명료한 결론으로 향한다. 여기서 ‘온전한 실현’이란 서구에서 수립된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델,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향한 전진 운동을 말한다. 이 모델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향해 올바로 전진한다면, 그것을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물론, 현실의 정치체제가 그것에 실제로 도달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이상적 모델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델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다.
🔖 한국에서도 PC는 페미니즘과 차별 반대 운동을 공격하는 이들의 언어가 되었다. 사회운동 활동가 중에 자신을 ‘PC주의자’나 ‘PC 지지자’로 부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식의 이름은 반대 진영의 낙인찍기가 남긴 결과물이다.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PC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나 발언이다. 예컨대, ‘절름발이’나 ‘외눈박이’는 차별적 표현이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고, 찬반 토론은 꼭 필요하다. 이런 논쟁을 통해 객관적 규범을 구체적으로 구성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반대 논변 없이 PC 운운하는 것은 ‘그런 지적질 피곤하다’고 불평하며 규범 수립을 위한 논의의 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PC에 대한 지지나 비판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행위가 차별인지 아닌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위해 타인의 차별 행위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지적이 정확하고 합리적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우월감을 비판하면 된다. 만일 지적 자체가 잘못되었다면, 그의 모든 것을 거부하면 된다. 어느 경우든 PC를 문제 삼는 건 뜬금없는 일이다. 만일 차별 행위에 대한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면, 개인의 자유를 세밀하게 규정하는 작업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 이때도 PC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PC라는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집단을 향해 ‘그래도 PC는 중요하다’라고 소심하게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엉뚱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지금 방어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차별 반대 등이지 PC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때 이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 한국에서는 권력관계가 권리-의무 관계를 대체한다. 약자의 의무와 강자의 권리만 넘쳐나고, 약자의 권리와 강자의 의무는 쉽게 무시된다. 내게 힘이 있으면 내 요구가 권리로 인정되지만, 힘이 없으면 ‘생떼’ 취급받는다. 이런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약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라는 훈계가 뒤따르는데, 이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줄 생각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약자는 애초에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약자인 것이다. 법률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권리와 현실에서 작동하는 실질적 권리를 구별하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 그 누구의 지지도 얻지 못한 힘없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만이 실질적 권리라고 불릴 수 있다. 다수의 마음을 얻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는 종이 쪼가리 위에나 존재하는 텅 빈 권리일 뿐이다.
🔖 민주주의의 평등 원칙은 이런 종류의 인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이런 차이가 윗사람-아랫사람 관계나 갑을 관계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조직과 업무의 특성에 따라 지위의 위아래는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람의 위아래는 없다. 계약이란 동등한 개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합의이지, 갑에 대한 을의 종속을 강제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갑을 관계는 정상이고, 갑질이 비정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마치 주인과 머슴의 관계는 존재할 수 있지만, 주인이 머슴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연구재단은 갑질로 징계를 받은 연구자의 사업 신청을 제한하는데, 갑질을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상대방인 을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이 권한을 남용하여 을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나 처우”라고 정의한다. 흥미로운 점은 갑과 을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 여기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일반적 경향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불평등 자체는 정상으로 인정하면서,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도한 폭력만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이런 식으로 폭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권력에 저항하는 대중운동은 반드시 반개념적 언어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고 강화하는 작업에서는 ‘주권’ 개념의 엄밀하고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두 가지 언어 사용법의 공존은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이다.
말의 개념적 사용은 규칙을 수립한다. 기표를 개념에 고정함으로써, 주어진 기표를 어떤 의미로 써야 하는지 정한다. 반개념적 사용은 기표를 개념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그 규칙을 무력화한다. 언어 사용의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해야 한다는 말은 언어 규칙의 수립과 파괴가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문제는 후자가 전자를 완전히 압도한다는 데 있다. 규칙을 파괴하는 경향이 언어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언어적 수준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언어의 규칙이 부재하면,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공통 규칙 역시 수립될 수 없다. 공동체의 규칙이란 결국 언어적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문제는 이념과 비전의 부재가 극우정당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민주당의 정체성 역시 이념이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통해 형성된 공통의 역사적 경험과 인적 계보에 있다. 어떤 이들은 민주당에 자유주의나 좌파 따위의 딱지를 붙이는데, 어림없는 소리다. 임신중단에 관한 입장이 없는 자유주의자, 차별 금지에 무관심한 좌파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국민의힘 반대’ 외에 민주당의 지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한국 정치를 ‘이념 과잉’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독재 권력의 상속자들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계승자들이 치열하게 대립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 이념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자는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정치적 공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제대로 작동할 때 극우와 분리된 보수가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원칙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지 않는 한, 보수 없는 극우만이 존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