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인슈타인이 기하학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 법칙은 현실을 설명하기엔 확실하지 않고, 확실한 수학 법칙은 현실과 관련이 없다”(참고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 명언이다). 이 말은 정량화의 한계와 비용을 잘 드러낸다. 특히 나란 사람은 무언가가 마 무리되고 명료하게 정리되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살아간다. 그렇 기에 정밀함이 진실과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나는 지금 왜 내 삶을 관찰하고 또 측정하는지 스스로에게 항상 질문하라. 마라톤을 하면서 마일리지를 쌓아 나가듯 실체가 있는 목적으로 가는 길을 돕기 때문인가? 아니면 없어도 되는 목발이나 습관 같은 것인가?
🔖 그렇다면 관찰이란 단순히 ‘보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함이지 그저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목적을 수행하려면 방향 그리고 끝이 있어야 한 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한 지식을 습득하고 실마리를 모아 가설을 짜기 시작하거나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알고리즘을 코딩할 수 있다. 관찰이 유용하려면 그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관찰이란 “어떠한 관점의 편에 서거나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라는 다윈의 주장처럼 말이다. 물론 과학자는 관찰과 배움, 그들이 발견한 것에 대해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고 해서 첫 관찰의 씨앗을 수확해 더 크게 키울 시점을 미루지도 않는다. 씨앗이 결국에는 의미 있는 발견이 되도록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 평생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고정된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얻을 것이 없다(잠깐 자존심을 세우는 것 빼고는). 반면, 자신의 의견과 관점을 하나의 가설로 대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자신의 가설이 증거를 통해 시험되고 입증되어야 하며 그 결과 지속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다. 모든 실험실에서 역설과 블랙 코미디가 중요 요소인 이유다.
🔖 연구란 과거에 저지른 잘못, 시간을 낭비했다는 증거,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암시 등으로 자신을 매질하는 시도다. 모든 것을 걸었어도 연구자는 자신의 직감을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한 다. 과학은 이토록 찬란하게도 불확실한 세계다.
🔖 이 세계들은 막다른 길 혹은 단지 더 나은 어딘가로 가는 통로라고 판명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다. 사용 가능한 퍼즐 조각들을 배열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의 형태로 나타내는 능력,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볼 뿐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해 지각하는 능력, 그리고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단순화를 통해 어떤 작동 원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라진 상태임을 이해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 우리는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일과 여가에 대해 모두 같은 난제를 마주한다. 세상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 작은 공간조차 가능성의 측면에서 설명하자면 대단히 크다.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 …… 자기에게 이상적인 인생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낸 다음에는 최선을 다해 그 삶을 살면서 그 과정에서 차 버렸던 다른 모든 경로는 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