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에서 질병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죽음은 ‘치료의 실패’로 인식된다. 환자에게는 끝까지 치료에 매달려야 한다는 압력이, 가족에게는 끝까지 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부담이, 의료진에게는 최신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가 작동한다.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제안하는 것은 쉽게 ‘포기’로 오해받는다. 그 결과 임종에 관한 대화는 미뤄지고, 연명의료나 호스피스에 대한 결정은 지나치게 늦어진다. 환자의 고통이 충분히 조절되지 못한 채 임종에 이르는 일이 한국 의료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이유다.

🔖 조력임종을 법제화한 나라들에서 안전장치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지이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사례를 보면 우려할 만한 정황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기존 의료인이 조력임종을 거부한 뒤 다른 클리닉을 통해 시행한 사례 가운데 약 6.8퍼센트가 중대한 기저질환 없이 삶에 대한 피로감 등을 이유로 진행한 것으로 보고됐다. 벨기에에서도 전체 사망에서 조력임종이 차지하는 비율이 2007년 1.9퍼센트에서 2013년 4.6퍼센트로 두 배 가까이 늘었는데, 특히 여성이나 80세 이상 고령자, 요양시설 거주자처럼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에서 증가했다.
이 사례들은 조력임종이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에게만 한정된 선택이 아니라, 고령이거나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쇠약과 고립, 삶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한다.

🔖 완화의료와 의사조력임종이 조화롭게 공존하려면, 우리 사회와 의료인 모두가 극심한 고통 속에 놓인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면서 동시에 어떤 고통에 처한 사람의 삶은 끝나도록 돕는, 매우 위험한 균형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료인마저 엄혹한 조건에 놓인 삶의 가치를 스스로 절하하게 되거나, 환자가 더 잘 살도록 돕기보다 생을 마치도록 돕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쉽게 판단해버릴 위험이 있다.

🔖 저는 ‘완화의료와 돌봄이 임종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앞서,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의료의 핵심 목표가 될 수 있 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병원은 생명을 살리고 연장하고 완치시키는 곳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완화의료와 돌봄은 본래의 의료에 덧붙이는 부가 서비스처럼 취급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완치를 목표로 하는 치료 과정에서도 질병을 안고 살아가며 고통을 조절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인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더라도 환자가 그 질병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 역시 핵심적인 의료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이 자리 잡아야만 호스피스와 완화의료가 의료의 필수 서비스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