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모욕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복창해. 이제 개처럼 엎드려서 내 발을 핥아).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 사회 안에 자리/장소가 없는 사람,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서줄 제삼자를 갖지 못했기에, 사적 관계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장소를 지킬 수 없다.
🔖 절대적 환대가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개방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데리다가 그랬듯이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러한 환대가 과연 가능한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 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 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방지법을 만드는 일,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는 일, 집 없는 사람에게 주거수당을 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 실업 수당을 주는 일은 모두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는 현대적 이상은, 생산력이든 자본주의의 모순이든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떤 자동적인 힘에 의해 앞으로 굴러감에 따 라서가 아니라, 이러한 공공의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
🔖 그러므로 환대란 어떤 사람이 인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행위라고 말하기로 하자. 그 경우 데리다가 제시하는 절대적 환대의 세번째 조건을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법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환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 안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바로 환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는 사회 안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전쟁이 작동해왔는가를 보여주면서, 전쟁을 국경으로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사회를 절대적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암시한다. 전쟁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아직 도래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리의 안정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라도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어 성원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 환대는 그러므로 전쟁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환대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칸트의 유명한 텍스트에 ‘영구평화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칸트는 보편적인 환대를 영구평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셈이지만, 우리는 그 역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구평화야말로 절대적 환대의 조건이라고 말이다.
🔖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 - 환대 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 -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아젠다를 구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