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이버는 우리가 스스로를 소비자라고 여길 때 무언가 파괴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 바깥에서도 생산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 셔먼은 착한 부자와 나쁜 부자를 나누는 일은 부자에게나 다른 모두에게나 한낱 시간 낭비라고 주장한다. 행동을 기준으로 부자를 평가하는 것 —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일하는지, 충분히 합리적으로 소비하는지, 충분히 남에게 돌려주는지 — 은 엄청나게 불평등한 부의 분배의 도덕성을 묻는 다른 종류의 질문들에서 시선을 돌리게 만들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부자에게 착한 것을 요구하는 대신 우리의 경제 체제에게 더 나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 프로스트는 다른 사람이 돈벌이로 하는 일을 놀이로 할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굳이 그 일을 하겠다면, 그때 그의 권리는 사랑이었다. 그들의 권리는 필요였다. 〈그들의 권리가 더 낫다 — 인정한다.〉 그는 양자를 분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과 필요가 하나가 될 때에만, / 일이 생사를 건 놀이일 때에만, / 그 행위는 진정 천국을 위하여 / 그리고 미래를 위하여 수행된다.〉
🔖 우리가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은 마추카토가 바꾸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다. 그녀는 우리의 가치 개념이 순환적이라고 지적한다. 〈소득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한 대가라고 정당화된다. 그런데 그 가치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것이 소득을 벌어들이는가 아닌가에 따라 측정된다.〉 그리하여 《불로 소득》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만약 우리가 가치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의 경제 체제를 손질하여 가령 어린이 복지나 환경 보전처럼 사회 전체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에게도 경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도 투자는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투자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비극은 이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비극은 그 글이 쓰일 시점에 이미 공유지는 사라졌다는 점, 그리고 과거에 모든 사람이 공유지에서 최대한 많이 얻어 내는 것을 방지하는 규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이미 잊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유지란 규제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이 글의 해석임을 나도 안다. 이 글이 실은 가난한 사람들의 〈번식〉을 제한하려는 논증으로서 작성되었으며 부정확하거나 아예 틀린 점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오래 살아남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글의 진실성은 영향력보다 덜 중요하지.」 언젠가 한 동료는 이 글에 대해서 내게 말했다. 동료의 말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거짓말이 우리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려 준다는 뜻이었다.
🔖 〈마흔 살이 되어 갈 때, 나는 허비된 시간 속에서 시들어 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파악하고 그 속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특별한 꿈을 꾸었다.〉 코널리는 말한다.
「시간과 돈을 보면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 수 있죠」 이 이웃은 언젠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음악과 연극에 써서, 콘서트와 공연을 보러 다닌다. 그녀는 예술에 투자한다. 나는 내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글에 쓰고 내 돈은 이 집에 쓴다. 나는 그동안 한 가지 결정을 내린다. 나는 책 — 이 책 — 을 팔아서 나 자신에게 시간을 사 줄 것이다. 내가 이미 글쓰기에 써버린 내 시간이 제값을 스스로 치를 것이다. 마치 푸코의 진자처럼, 무겁고 반들반들한 추가 길이 67미터의 철선에 매달려 앞뒤로 조용히 흔들리면서 그 축으로써 지구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그 진자처럼, 이것은 무동력이고 자유롭고 영구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마찰에 의해 사라지기 마련이다. 진자는 결국 느려지다가 멈춘다. 그리고 이 위에서, 시간에 대한 나의 욕망에 의해서 책들이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나는 갓 파낸 흙이 가득 담긴 손수레가 나의 조용하지 않은 무덤 위에서 쉬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이제 나는 내가 판 구덩이 속에 들어와 있네, 나는 재미있어하면서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성취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