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서 마지막 대목, ‘달리아를 심었다고 생각했는데 가지가 튀어나왔다’를 나는 ‘진실한 말(자신의 단어)이 삶을 놀라운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한번 놀라고 나면 그다음 놀라움도 가능하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야기의 신비로움은 삶의 신비로움이 된다. 그 반대말도 사실이다. 삶의 신비로움 없이는 이야기가 없다. 좋은 이야기 안에는 늘 원인과 결과의 딱딱한 인과론만으로도, 숫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이 모든 좋은 이야기 안에 있는 ‘고유한 기쁨’이고, 보르헤스가 언어 공동체에서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말을 찾는 것이고 단어를 찾는 것은 부적과도 같은 힘을 주고, 단어를 찾는 것이 곧 회복이라 말한 뜻일 것이다.
나는 현재 우리의 위기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믿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더 이상 좋은 미래를 믿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질문을 하고 대안을 말하는 것을 너무 큰 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미래다.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가 이 좋은 미래를 만나는 방법은 좋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 앞에는 언제나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의 심장에서 나온 살아 있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 살아 있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우리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주 슬픈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어둠 속에서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 글의 초반에 몇몇 단어들이 그립다고 한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몇몇 단어 안에 비밀이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바꾼다. 우선 이야기를 하면서 나부터 새롭게 바뀌고 싶다. 나의 누이는 너의 누이가 되고 나의 전투는 너의 전투가 되고 나의 늑대는 너의 늑대가 되고 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 되고…
그리고 다음번에는, 우리는 정말로 더 잘 사랑해야 한다. 처음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많이.

🔖 제 아내와 제가 사는 것, 혹은 제 친구들과 제가 사는 것이 그렇죠. 우리는 서로가 지고 있는 무게를 알아요. 제 아내와 저도 서로 상대방이 지고 있는 무게를 압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항상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가 보여요. 제 생각에 사람 사이의 균형과 조화란 게 서로의 무게를 알면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야 둘이 같이 가라앉지 않아요.
(…)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당신은 타인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를 주로 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린다는 생각에 고통을 받는다.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여름, 국수를 좋아하는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강화도에 맛있는 국숫집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일몰도 볼 겸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로 갔다. 우리는 식사 전에 호젓한 둘레길을 별말 없이 걸었다. 좁은 흙길 한가운데 여치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커다랗고 잘생긴 놈이었다. 자세히 보니 여치의 날개 한쪽이 없었다. 아버지가 여치를 들어서 풀잎 위에 올려놓았다. 몇 발자국 걷다가 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동안 우리는 여치가 앉아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풀을 바라보았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기 어디 여치가 계속 풀잎에 안전하게 있기를 바라면서 봤다. 덧없을지라도 여치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 작은 손짓이 여치에게는 혹시 다른 미래가 될 수도 있을까?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 수도 있을까?
우리가 동시에 뒤돌아보던 모습은 내 마음속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이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단어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여치를 집어 들던 작은 몸짓 하나만 말하려고 해도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랑 이야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 몸짓을 보면서 나는 한때 지상에 태어나 살았으나 이제는 없는 한 아이의 존재를 느꼈다. 이제는 곁에 없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몸을 통해 무수히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