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년필은 서랍 안에 녹슨 채 그대로 들어 있고, 새 울음소리는 책갈피 속에 더러더러 끼어 있고, 단힌 책과 열린 책 사이로, 말하는 입과 듣고 있는 귀 사이로 시간은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 빙글빙글 넉살 좋게 웃으며 이대로, 자꾸만 틀린 스텝을 밟으며 이대로.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생각해보면, 우우, 지겹고 지겹다.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괴로운 기억들과 즐거운 방법적 꿈 사이를, 눈 가린 절망과 눈 가린 희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럼 어떠냐, 뻗을대로 뻗어라. 네 팔자로 뻗어라. 어차피 한판 놀러 나왔으니까, 신명 풀리는 대로 놀 수밖에. 안 풀리면 안 놀 수밖에. (1981)

🔖 그래서 물은 더욱 공포스러워하지. 그때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육체)이라는 형태를 생명으로 알았던 물은 자기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순간은 오고, 그리하여 그 물 중의 어떤 부분은 증발해 바람에 실려갔고, 다른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그때 공기로 변하는 쪽을 택했던 물은 비로소 그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래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죽음을 맞이했던 다른 부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떨어져나가야 했던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아마 우리 인간들의 삶도 그럴지 몰라. 언젠가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는 인생이 겉으로는 무시 무시하고 불행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