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소설가가 존재와 사물의 본성을 다른 사람보다 잘못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소설가는 그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만나거나 가까이 에서 산 모든 사람을 언제나 상상했다. 상상 전문가에게는 그편이 훨씬 쉬운 일이고 덜 피곤한 일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알려고 애쓰거나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다 깜짝 놀랄 일이 생기면 그들을 끔찍이도 원망한다. 그들이 자기를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자기 재능에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 나는 속에서 구멍이 나고 있었다. 그 개를 훈련한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문장은 그 역명제도 성립한다는 얘기다. “내가 ‘당신들’이라고 할 때는 내 얘기이기도 하오.” 이 명제에 따라 “tea for two and two for tea” 하는 예쁜 노래도 다른 노래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죠”. 이 노래에는 심지어 제목도 있다. 박애.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비상구는 없다.
🔖 “무엇보다 키스의 웃음이 거슬렸어요. 그건 승리에 도취한 웃음이었어요. 여러 종류의 승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 승리는 어떤 승리보다 보기가 역겨웠어요.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죠. 저자는 어떻게 저렇게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고문으로? 얼이 빠져서 갈피를 잡지 못 하는 그 개를, 인간 때문에 함정에 빠져 제 반사 행동을 거스르며 겁에 질린 채 어찌할 바 모르는 그 개를, 그 역사적인 개를 보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웠어요. 참기 힘들 만큼 추악한 광경이었죠. 그 순간엔 키스가 거의 혐오스러웠어요.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혐오스러웠던 것이지, 그 사람 개인이 혐오스러웠던 건 아니에요. 그렇다고 모든 걸 언제나 사회에 전가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우리는 개인의 책임으로 비열한 짓을 할 때도 있죠. 이 일엔 개를 되찾아가서 ‘치료’를 하겠다는 선의라곤 전혀 들어 있지 않았어요. 이건 인간들끼리의 문제였죠·····.”
(…)
내가 질문을 던진 친구들 대부분은 우리 입장이었다면 개에게 주사를 놓았을 것이라고, “아무리 좋은 감정 에도 한계는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한계를 두는 사례를 주변에서 줄곧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 제거’라는 현대적 흐름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감정의 인플레이션을 빌미로 감정을 평가절하하길 거부하고, 100프랑의 고통이 1프랑의 가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다시 말해 어제는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했던 곳에 백 명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