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침묵하여 보이지 않던 피해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괴물’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란 단어는 계속 괴물 당사자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머드 같은 동물은 주변 모든 것은 물론 공기까지 빨아들일 것만 같다. 이 괴물의 이름을 열거하고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뭘까? 우리는 어디로 갈까? 혹시 이들을 괴물이라 부르고 이들의 괴물성에 대해 글을 쓰고 이들의 괴물 범죄를 묘사하면서 이 괴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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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우리 시대 여성의 질병이었다. 나는 이 병을 여자들의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사무실로 날아오는 편지에서 본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한 현실을 향한 원망이고 이 독성 어린 분노는 비개인적이다. 이 병이 비개인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운 나쁜 사람들은 분노를 남편이나 연인에게 돌린다. 나처럼 운 좋은 여자는 이에 맞서 싸운다.

🔖 다른 사람이 부적절하게 소비한다는 말은 적절한 소비가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이 괴물 남자들의 예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정된 소비자의 역할로 밀어 넣는다. (…) 문제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소비자는 언제나 윤리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련의 결정이 내려진 다음부터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이 올바르고 윤리적인 행동인지 스스로 해석해야만 한다. 마이클 잭슨의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질 때도 여전히 마이클 잭슨은 이용당하고 포장되고 공급되고 충족되고 구미에 맞춰지고 있었다. 음악 산업은 음악 종사자와 관련된 윤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일은 우리에게 떠넘겨진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을 때, 당신이 특별한 종류의 공감을 받았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 공감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호혜로서가 아니라, 공평성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착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나쁜 점이 평범하다는 것을 듣고, 그 평범함에 대한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하는 것이 계속 술을 마시지 않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카버를 강박적으로 읽었다. 나 자신의 경험은 그 독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나의 역사, 나의 지리적 배경, 나의 음주, 나의 문학적 열망이 카버에 대한 사랑을 형성했다. 또한 카버의 인생에 의해 독서 경험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모든 복잡한 역사와 흐름에서 평범하고 복잡하지 않은 것이 흘러나온다.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