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지식과 소위 비과학적이라 여겨지는 앎. 이 중에서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사람들이 받아들인 앎의 체계가 그 집단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혹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일찍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했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앎의 체계는 상호 공약 불가능하며, 하나의 앎의 체계에서 다른 삶의 체계로 넘어가는 과정은 종교적 개종에 가까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과학자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과학 이론의 전환도 이러할진대 정치적 종교적, 관점의 전환은 오죽할까. 무엇이 진실인가? 이것은 내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끝없이 탁상공론하게 만든다.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어떤 진실은 어째서 그토록 강렬하게, ‘진리’라는 느낌을 주는가. 인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보이고 들리게까지 만드는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넘어 집단의 경험으로도 나타나는가. 그 인식은 어떻게 눈앞의 인간을 적으로 만들거나 가해자로 만들거나 악마로 보게 만드는가? 어떻게 정의 혹은 평화를 위해 그를 죽여도 된다고까지 밀고 나가게 만드는가?

🔖 청년 문제가 실력주의의 얼굴을 하고 탈정치화되고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표출될 때 변화는 더디게 올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싸울수록 우리는 더 가난해지고 오래 불행할 것이다.

🔖 마법사는 자연을 “그저 자신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가만히 놓여 있는 무한한 자원”으로 “기계에 들어갈 원재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하고요. 예언가는 “어머니 자연이 죽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거의 열광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하며 “헐떡이는 자연의 몸 옆에 비극적인 기사처럼 앉아 자연의 수동적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고 표현해요. 한쪽은 자연을 정복 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다른 한쪽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굉장히 다른 태도이지만, 사실은 둘 다 나와 자연을 분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지요. 그런데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는 건 자연과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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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역시 기술결정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곧 어떤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막을 수 없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실행으로 발전의 방향과 속도가 결정된다고 볼 때 개입의 여지가 생기죠.
남성적인 것, 착취적인 것, 경제 발전 중심적인 것만이 기술이어 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돌봄을 위한 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지금의 지구에선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법사도 예언가도 아닌 존재, 현장에서 손을 더럽히면서 생생한 행위자로 존재하는 마녀가 우리 미래에 필요하다는 결론이 무척 좋았습니다.

🔖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염된 것들뿐입니다. 나는 여성적인 게 뭔지 몰라요. 내가 진짜 뭔지도 모르고요. 세상에 가짜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 엄청나게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짜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더 진실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글쓰기입니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낸다는 것은 아주 많은 소음과 뜬 소문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말 그대로 나를 갈라서 나를 꺼내는 과정입니다. 어떤 점에서, 모르겠어요, 저에게 하강의 이미지가 있거든요. 저는 이게 계속 내려가는 일이라고 느껴요.
이 일이 여성에게 더 유리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진실한 글을 쓴다는 것이 더러움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분열과 혼란을 겪기 때문에. 그 분열과 혼란이 힌트를 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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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글쓰기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전적으로 저 아래에 아주 아득하게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이들, 제가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고를 쏟아 자신의 글을 구부려 저 멀리 있는 진실 쪽으로 정렬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원소들에 대항하여 무엇보다 셀 수 없이 많은 당면한 내적 외적 적들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적인 것들이 아주 강력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입자, 반딧불이이고 주위에는 진실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소음과 소문 제조기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 내는 엄청난 소음과 소문의 합주가 울려 퍼집니 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내적인 적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공포와 관련된 것들이지요. 우리를 구성하는 것, 우리의 약점 말입니다.
(…)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법,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게 망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 인간이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끝을 경험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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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쓰는 행위 같지만 사실은 보는 행위입니다. 무엇을 어떻 게 볼 것인가. 저는 쓰는 것은 단순화하고 보는 것은 새롭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는 무수한 편견과 신화가 섞여 있습니다. 이것들을 음소거시키고 우리가 본 것을 믿는 것, 그럼으로써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새로 보는 것. 우리가 함께 만든 언어로 다음 여자들은 덜 외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읽어온 글보다 더 훌륭한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내 앎이 내 삶을 배반하지 않는 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이 가진 창조력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 대의와 개인적인 일을 구분하며 일상 속 부정의에 무심히 지내면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동의했던 생각은 얼굴을 바꾸어 다른 약자를 억압하기 시작하므로.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오늘의 혁명가가 내일의 독재자가 되는 모습을 전쟁과 학살이 벌어지는 세계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지 않나. 우리는 권위주의 정부의 폭력에 맞서 소리치면서 동시에 누가 권력을 쥐더라도 우리 삶을 흔들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 나는 혁신을 부르짖으며 모든 규제를 구태로 보는 사람들을 다소 의심스럽게 본다. 과학기술은 남겨진 사람들, 느리게 걸어오는 사람들, 때로는 아파서, 움직일 수 없어서 누워 있기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함부로 대해진 동물과 지구에 응답해야 한다. 쌩쌩 달리는 과학기술에 미쳐 손을 붙들어 매지 못하고 떨어진 사람들을 지르밟고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첨단이고 혁신이라면, 나는 그것을 야만이라 부르겠다.

🔖 그러나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다. 피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는 말했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시도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려는 헛된 시도이며, 무엇보다 타인의 깊은 슬픔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닫아버리는 행위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의 취약성을 거부하느라, 존재하는 매 순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까지 거부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과 파동과 대화의 토대를 마비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취약성 안에 어떻게 머무를 것인가다.”
(…) 어떻게 하면 더 용감해지고, 더 자비로워질 수 있을까. 두 개의 선택지가 매일 펼쳐진다. 취약성 안에 머물며 온전하고 힘차게 살아 가는 것과, 인색하게 굴고 불평하고 두려워하며 삶의 문턱을 온전히 통과하지 않는 것. 취약성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과, 세상과 용기 있는 대화를 지속해 나가기. 그것이 내가 나에게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찾고 있는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