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정’이란 말이 어느 날부터 방향을 바꿔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정은, 어감부터가 단호하다.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세상에서 약자들을 지켜주는 방패다. 역사에선 그랬다. 사람들이 공 정이란 말을 많이 할수록 그 사회는 조금이라도 살 만한 세상으 로 변해갔다. 지금은 아니다. 차별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단어 가 ‘차별하는 것이 공정이다’라는 문장으로 소비된다. 차별을 옹호하는 이들은 불평등의 이유를 개인의 노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면 정규직을 준비하는 나는 무엇이냐면서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공정이 앞에 있고 우롱과 조롱이 뒤를 따랐다. 능력주의가 과잉될 때, 민주주의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짚어보자는 내 말에 한 학생의 평은 이랬다. “능력주의가 민주주의 아닌가요? 그게 공정한 세상이죠.“
’자유’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장애인 권리 지켜준다고 비장애인이 힘들단다. 동성애자의 존엄성을 인정하면 이성애자가 불편하 단다. 임대 아파트 때문에 자기 집값 오르지 않으면 책임질 거냐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싫어할 자유, 혐오할 자유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한다. 자유가 멋대로 사용되면, 이토록 빈약한 단어가 된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찾는 과제를 냈는데 엉망으로 한 학생이 있어서 따끔한 코멘트를 했다. 그 학생은 학교 게시판에 “강사의 의견에 반대할 자유를 침해당했다”는 글을 남겼다.
‘인권’도 뒤틀렸다. 인권은, 어감부터가 진중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세상에 인권이란 말은 ‘짓밟히는 사람들’의 살려달라는 소리로 등장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건 거대한 무엇으로부터 ‘밟혔기’ 때문이다. 내이 튀어나오는데 가만있을 생명체는 없다. 사람도 몸과 마음이 찌그러지면 저항한다. 목숨을 건다. 인권이란 키워드가 태생적으로 거친 이유다. 생존 투쟁이어서다. 그러니 인권 교육은 착하게 살자가 아니다.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했는지를 짚지 않고선 그다음 이야기를 할 수 없 다. 절대 밝은 분위기에서 전개될 수 없다. 숙연해지는 건 당연하다. 이를 싫어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긍정은 이런 거다. 박정희 정권 때 경제가 성장하지 않았느냐, 전두환 정권 때 좋은 점도 많았다 등.
(…) 누구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고, 공정을 들먹일 수 있고, 인권에 예민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방향이 공동체가 좋아지는 것과 무관하다면? 그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공정은 차별의 다른 말이다. 그 인권은 비겁한 기계적 중립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 이런 오용은 너무 흔하다. 자본주의라는, 능력주의라는, 성별에 따른 차이라는 ‘원래 그렇다’는 식의 생각이 누군가의 삶을 푹 꺼지게 한다. 이걸 다시 들어 올리는 일이 어찌 잔잔하게 이루어지겠는가. 누군가는 눈에 불을 켜고 일상을 헤집고 다녀야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시위하겠다는 용기를 지닌 이들이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을 격려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과정은 때론 시끄럽고 거칠다. 아니, ‘항상’ 시끄럽고 거칠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