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와 현대의 위대한 철학의 아버지들에게 이성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고 우월하게 만드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성이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섀도이다. 이성은 커다란 도구 상자 안에 든 하나의 도구이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뇌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정보 저장 구조를 조작하는 세상 속 과정에서 찾을 수도 있다. 나아가 혹시 개라면 특히 그럴 텐데, 다른 사람의 뇌에서 찾아낼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성이 어디 있는지, 누가 가졌는지가 아니라 언제든, 어떻게든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타인이 추론을 대신하도록 위임하는 것, 즉 나를 대신해 이성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이성적인 행동이다.
🔖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산다. 우리는 천국이 아닌 우리가 딛고 선 이 땅 위에서 두 삶을 살고 있다. 내부에서 사는 삶이 있고 외부에서 사는 삶이 있다. 하지만 개에게 삶은 필연적으로 내부에서만 살아지는 것이다. 견생에는 내부만이 존재하며 이는 시야에 한계가 없듯 한계가 없는 삶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했듯 시야의 한계는 볼 수가 없다. 시야의 한계는 보는 것이 멈추고 보이지 않는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 지당한 논리이다. 시야의 한계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래서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더는 시야의 한계가 아니라 시야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시야에 나타나는 것은 한계가 될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비트겐슈타인은 죽음이 삶에 속한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닐 것이다. 시야의 한계가 시야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은 삶의 한계이기에 삶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내부에서 바라본 삶, 즉 지금 살고 있는 삶에만 해당한다. 개는 이런 종류의 삶만을 살기 때문에 견생에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한계가 없다. 하지만 인생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부에서 바라본 삶과 외부에서 바라본 삶, 두 가지를 동시에 산다. 그리고 외부에서 본 삶에는 식별 가능한 한계가 있다. 외부에서 볼 때 죽음은 삶의 한 사건이다.
개와 달리 인간은 삶을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기도 한다. 삶에서 우리는 배우이자 관객이다. 배우로서 우리는 삶에 몰입한다. 하지만 관객이 되면 삶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 결과, 두 삶 중 어느 하나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 이것은 삶의 개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 속의 의미는 진정한 행복이고, 행복은 본성에서 우러날 때 진정성을 지닌다. 그러나 개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한 의미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개의 본성은 화강암 판처럼 묵직하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성찰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조각났다. 우리에게 본성이 있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고 속이 훤히 비치는 천만큼 얇디얇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추가 협상을 위한 기초 단계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기 해석적 존재이기에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 나의 본성으로 말하자면, 내가 무엇인지는 물론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무엇인지 해석하는 방식,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다양한 사건과 상황에 어떻게 의미를 할당하는지도 있다. 좋든 나쁘든 내게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어떤 의미인가? 내 삶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앞으로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나의 본성은 항상 진행 중인 작업이며, 섬세하고 지속적인 해석을 위한 노력의 문제이다. 삶 속의 의미는 본성에서 분출하는 행복이다. 그러나 나의 본성에는 고정된 것이 거의 없다. 나의 본성은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안정하다. 나를 해석하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은 나의 해석을 위한 노력에 쉽게 영향을 미친다. 나의 본성에는 행복이 분출의 도약대로 삼을 만한 확고한 기반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섀도의 견생이 나의 인생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다.
🔖 기억을 잃으면 그 기억들은 어디로 갈까? 우리 집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했던 질문이다. 좋은 질문이다. 정말 좋은 질문은 아주 어렸을 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대답을 찾기 위해 10년도 넘는 긴 세월을 보냈다.
(…) 내 기억 중 일부는 암울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관념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면서 살아갈 것이다. 내게 관념이란 내가 한때 가졌던 기억의 형식적인 요약일 뿐이다. 관념은 생명을 잃은 기억, 즉 다시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는 기억이다. 관념으로 가득한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실은 내가 얼마나 내 기억을 붙들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영속성과 불변성은 기억의 방식이 아니며,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했듯이 기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을 놓아주고 돌아올 때까지 막대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억은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며, 그 모습은 시선과 몸짓이며, 이름도 없으며, 더는 자신과 구분할 수 없는 모습이다. 결국 나는 붙잡아둘 수 없는 기억을 놓아줌으로써 지키고, 그 기억들이 다시 나타난 모습인 관념을 지킨다. 나는 기억으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을 주장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내가 생명을 다시 불어넣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이다.
(…)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도 나의 반려견들은 타락 이전의 시절을 말해준다. 그들을 통해 내 안에 성찰의 협곡이 열리기 전을 기억한다. 내가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이었던 시절, 내게 하나의 본성과 하나의 역사와 하나의 삶만이 있었던 시절. 그 삶에서 나는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가슴, 하나의 머리로 사랑했다. 나는 에덴동산을 다시 걷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추방은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반려견들은 가끔 내게 멀리 요단강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베일에 싸인 그곳을 엿보게 해준다. 반려견들과 함께 기억 속을 걸을 때면 나는 가끔 에덴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