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이런 책을 읽고 싶었다’는 독자의 반응은 읽은 후에 독자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읽고 싶은 책’의 조건을 딱 충족시키는 책과 드디어 만났다는 이야기만큼 우리를 달뜨게 하는 것은 없죠.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만난 후에 ‘그 책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나’라는 상을 빚어 냅니다. 사후에 기억을 개조하는 거죠. 급히 덧붙이자면 이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 기억을 고쳐 쓰면서 살아가는 생명체니까요.

🔖 아마도 사람 없고 조용한 공간이 아니면 ‘책’이 저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테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런 때면 제가 이 세상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의 거의 모든 책을 저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책의 99.999999퍼센트를 저는 아직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망연자실해집니다. 제가 모르는 세계가, 그리고 자칫하면 제가 죽을 때까지 모르고 끝날 세계가 그만큼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 앞에서 종교적이기까지 한 감동을 느낍니다.

🔖 도서관이 거기에 들어온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무한이라는 개념일 겁니다. 거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인생의 유한성’과 ‘앞의 유한성’을 자각하죠. 이 이상 교육적인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얼만큼 자신이 세상을 모르는가, 세상을 모르는 채로 일생을 마치는가. 앞으로 평생을 바쳐서 아무리 똑똑해지려고 노력한들 이 거대한 앎의 저장소 가운데 끄트머리 한구석밖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다만 끄트머리 한구석이라고 해도 ‘내가 이 무한한 장소의 일부만큼은 닿을 수 있고 잘하면 그 일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 무한한 장소에 내가 만들어낸 것을 보탤 수 있겠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지적’ 상태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하면 ‘조심스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삶에 대한 ‘예 의 바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지, 내 앎이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좁은지에 관한 ‘유한성의 자각’이 지적 상태입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이렇게 ‘무한한 앎을 향해 열린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고요.

🔖 독서인은 유용한 지식과 실용적인 정보를 얻으려고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결여리 채우기 위해서 책을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직 여기에 없는 결여’를 기준으로 책을 선택합니다.
(…) 책의 본질은 ‘언제가 읽어야 한다는 관념’ 위에 있습니다. 출판 비즈니스는 이 ‘허’ 慮의 수요를 기초로 존립합니다.

🔖 하이데거부터 도라에몽까지, 마루야마 마사오부터 다리오 아르젠토까지 넓게 커버할 수 있는 관용적 지성의 소유자임을 알아 달라는 제 욕망이 거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책장에 어떤 책을 어떻게 꽃느 냐 하는 문제에는 수행적인 목적이 동반됩니다. (…) 인간은 자신이 달성한 일에 관해 종종 ‘바람’과 ‘사실’을 혼동합니다. 똑같은 일이 책장에서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자주 경험하는 일인데요. 우리 집에 와서 제 책장을 본 사람들은 제가 거기에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죠. 설마 그럴 리가요.

🔖 책이 상품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시장을 오가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텍스트의 질이 올라가서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양쪽의 이익이 증대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입니다. 책이 본래 상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