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 설명이다. 이때 아버지가 말한 소수 집단이란 해당 질병에 특히 취약한 사람들이다. 인플루엔자의 경우, 노인들이다. 백일해의 경우, 신생아들이다. 풍진의 경우, 임신부들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 여성들이 제 자식에게 백신을 맞히는 건, 독신인 어머니가 최근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미처 아이를 완전 접종시키지 못한 일부 가난한 흑인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동참하는 일일 수 있다. 이것은 한때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육체적 예속을 끌어내는 행위였던 백신 접종의 옛 적용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적어도 오늘날은, 공중 보건이 전적으로 나 같은 사람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오히려 어떤 공중 보건 조치들이 우리를 통해서, 말 그대로 우리 몸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생각이 조금쯤 진실이다.
🔖 나중에 나는 같은 교수가 학교에서 하는 강의를 들었다. 선천 면역과 후천 면역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난무하는 두문자어 들을(NLR이니 PAMPLI APC니) 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나는 면역계 세포들의 삶이 서로 키스하고, 순진해지고, 먹고, 배설하고, 표현하고, 켜지고, 지시받고, 제시하고, 성숙해지고, 기억하는 삶이란 걸 알았다. 「내 학생들하고 똑같네.」 시를 가르치는 교수인 친구가 말했다.
그 강의에서 떠오른 하나의 서사란 게 있다면, 그것은 면역계와 그것이 공진화하는 병원체들이 상호 작용을 벌이는 드라마 였다. 이 드라마는 가끔 진행 중인 싸움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파치 헬리콥터와 무인 드론이 동원되는 싸움은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재치를 겨루는 싸움이다. 「그러자 바이러스는 그보다 더 똑똑해져서, 천재적인 꾀를 냈습니다. 우리 전략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맞선 겁니다.」 교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몸과 바이러스는 치명적인 체스 게임에 푹 빠져서 서로 겨루는 두 지성이었다.
🔖 냉소주의는 타당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슬픈 것이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 보건 관료들, 의사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네트워크가 돈 때문에 아이들에게 부러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발상이 아주 그럴싸하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실제로 무엇을 빼앗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자본주의는 이미 남들을 위해서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또 시장성 없는 예술의 가치를 박탈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본주의의 압박을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본질적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모든 사람은 다 소유된 상태라고 믿기 시작할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진정 가난해질 것이다.
🔖 세상을 주유하기 시작했던 때, 젊은 캉디드는 낙관주의를 쉽게 포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그가 살았던 삶은 안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행하면서 전쟁, 자연재해, 강간, 교수형을 목격한다. 한 손과 한 다리가 없는 노예를 만난다. 노예는 그에게 <이것은 당신들이 유럽에서 먹는 설탕에 대해서 우리가 치르는 대가죠>라고 말한다. 캉디드는 의문하기 시작한다. <만일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들은 대체 어떻단 말인가?> 그러나 책은 해피엔드로 끝맺는다. 캉디드와 친구들은 - 투옥과 매춘을 겪고 매독과 흑사병에 시달렸던 이들이다 - 함께 작은 텃밭을 일구어 자신들의 정원에서 난 열매를 즐긴다.
플로베르는 『캉디드』의 결말이 훌륭하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인생 그 자체처럼 한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동생과 나는 둘다 『캉디드』를 처음 읽었던 순간을 기억하지만, 그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는 둘 다 잘 모른다. 최소한 동생은 자정에는, 그러니까 내가 동생에게 『캉디드』를 해석해 달라고 요구했던 그 시각에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해야 해.」 동생은 졸린 목소리로 내게 조언했다. 나는 그 결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을 때 가꾸는 정원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을 가꾸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정원의 은유를 우리의 사회적 몸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정원 속의 정원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바깥쪽 정원은 에덴이 아니고, 안락한 장미 정원도 아니다. 그 정원은 몸이라는 안쪽 정원,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나쁜> 균류와 바이러스와 세균을 모두 품고 있는 곳 못지않게 이상하고 다양한 곳이다. 그 정원은 경계가 없고, 잘 손질되지도 않았으며, 열매와 가시를 모두 맺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동체라는 말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