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론과 결혼하기
바닥을 모르잖아 / 그게 유일한 흠일지는 몰라도 / 그의 모터 소리는 우주를 범접하게 해 / 별에 스쳐 생긴 어깨 상처로부터 / 날개가 돋아나길 기대하게 해
그와 접속한 이후로 나는 나를 추월할 수 있게 되었지 / 추락을 일삼으며 더 높게 흩어지는데 /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쩌겠어?
약속했었지 리튬으로 재구성된 맹세를 /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거야 / 박수갈채 따윈 들리지 않는 행진으로써 / 눈물방울 모두 말려버리도록 바람을 가르며 / 축복 없이도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함정과 복수를 꿈꾸며 성실하게 지은 미로를 /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그이는 / 이 세계가 누군가의 신발 밑창이라고 여길 뿐 / 그 업신여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가볼 수 없는 곳의 파노라마를 보 여주곤 했지 / 미안 나는 심장이 유일한 약점이야 / 그는 무아지경으로 나를 맴돌며 행성 취급하고 / 이 바닥의 약속을 미물로 보게 만들지
내게 남은 마지막 약속을 위해 / 이제 그를 깨워서 결혼식장으로 가야 해 / 천장은 없고 이별하는 축하만 남아 있는 세계로 / 그는 결혼을 약속한 순간부터 고요히 잠들어 있어 / 망가지는 것을 지켜보았지 / 서로 맞지 않은 부품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 충전이 끝나기 전까지 어쩌면 / 나는 내 삶을 다 흘려보내게 될지도 모르지만
한 세기를 날갯짓하는 벌떼들처럼 / 공중에도 넘어질 곳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 / 그이와 남김없이 살아갈게

🔖 검은 개에 대한 잡문
어느새 개 한 마리가 나를 따라 걷고 있다 / 내가 / 내가 아님을 들킨 것일까 아니면 여자를 닮기라도 한 걸까
나는 부두를 천천히 걸으며 / 개에게 보이지 않았다가 / 다시 보이기도 했다 / 개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 보일 때에도 계속 나를 따라 걷고 있다
멀리 본 도시의 풍경이 뿌옇다 / 중국인 거리에서 / 누군가 오래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 물 위로 사람들이 노를 저었고
검은 개는 그저 걸을 뿐이다 / 네게도 고스트가 있나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기동대Chost in the Shell>에서는 영혼이란 단어를 ‘고스트’라고 부른다.
개는 대답이 없다 / 잠시 멈춰 서서 개를 쓰다듬자 / 개가 내 무릎을 핥는다
부두에 버린 시신을 발견한다 / 나의 얼굴을 한 여자다 / 개가 가까이 가서 / 여자의 뺨을 핥는다 / 나는 머리칼을 쥔다 / 으스러진다 / 녹는다
부두의 풍경은 그러하다 / 개가 짖는다
먼발치에는 물이 있다 / 개가 물을 본다 / 물 위에는 그림자가 있다 / 여자는 잠수를 즐겼던 모양이다 / 내가 물 위로 뛰어든다 / 깊이 빠진다
호랑지빠귀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 검은 개가 내 뺨을 핥는다 / 누군가 비파를 연주한다 / 어느새 나는 개에게 보인다 / 인식으로서 그러하다 / 다시 걸을 때도 개는 검은 개다 / 개는 사후적이다 / 내가 뒤늦게 나를 따라 걷는다

🔖 작은보호탑해파리
(…)
나는 각주 없이 이 시를 시작한다. 작은보호탑해파리 혹은 베니크라게라고 분류되는 이름으로 쓰는 초연(初演)의 시를.
박사는 나를 애지중지 아꼈다. 태어났 던 때로 돌아갈 때마다 이름을 지어주었고 나는 122개의 이름이 있다. 언어를 알려주었고 나는 물을 흐릿하게 비틀며 퍼져나가는 포자로 성실하게 움직였다.
그의 사랑에 화답하듯이.
박사가 죽고 나는 그가 나처럼 복제되어 돌아올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무능한 사랑의 절실함이 나였구나. 나는 그런 인간의 불능에 중독되었다.
수조는 더러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움직이고 싶지 않아 자주 뜰채에 건져졌으며, 나에 대한 연구는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박사에게 커다란 명예를 가져다주었으며 반려동물로도 큰 인기몰이를 했다. 거짓말. 우리보다 먼저 죽는 주인들로 유기되는 삶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느냐만은.
우리는 하수구에서 자주 만났다. 영생의 믿음으로 화로 위에 서기도 했다. 입을 쩍쩍 벌리는 백합찜과 소라 속에서 시가로 매겨졌다. 박사는 그곳에서 나를 데려왔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인간사의 숙명이로구나.
번데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를 그만 복제하고 싶다.
나에 대한 소설, 나에 대한 노래, 나에 대한 영화, 나는 은유의 껍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친구를 만날 수 없고 물속에서도 갈증을 느낀다. 무게도 없이 자꾸 가라앉는다.
박사가 컴퓨터 앞에서 안경을 고쳐 쓰며 한 번씩 나를 돌아봐 주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나에겐 뒤가 없어서 그 헤아림을 좋아했다.
122개의 이름을 한꺼번에 불러주었던 언젠가의 생일처럼
이 시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살아남은 방식처럼. 그러나 박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의 죽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주었으니까.
(부활 없음)
내가 영생하며 그에게서 배운 사랑은 이런 것이다.
반복과 수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