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긍정적 사고의 근간에는 삶의 어떤 것도 우리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메시지다. 긍정적 사고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하기보다는 모든 힘이 내 손안에 있다는 확신을 주려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이다. 나는 마음챙김 열풍과 신스토아주의의 매력 중 일부는 사실 변장한 긍정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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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에 완전히 얽매여 있고 그것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 통제형 성인과 요새 유행하는 현대판 성인은 인간사의 혼란스러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그 혼란이 바로 당신의 삶이다. 그 혼란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성을 버리려고 힘쓰는 것이다.

🔖 긍정 심리학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홍보됐다. 따라서 긍정적인 감정은 가치 있는 통화가 됐다. 즉 긍정적 감정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도 같은 종류의 통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이런 사고방식을 영속화할 뿐이다. 감정을 행복과 성공을 달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취급하거나 행복과 성공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하는 건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짓이다. 감정은 도구가 아니다. 감정은 에너지를 주는 연료가 아니다. 감정은 당신을 섬겨야 하는 머릿속의 작은 집사가 아니다. 감정은 마음의 벽장에서 치워야 할 잡동사니가 아니다.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감정은 내 삶의 일부다.

🔖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일관성이 없으며 의지가 약하고 자신의 결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몽테뉴는 이 모든 걸 인정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결점이 있음에도 삶과 자신, 인간을 사랑한다. 니체는 이런 마음가짐에 감탄했다. 그는 몽테뉴가 “정말로 기분을 좋게 해주는 명랑함”을 지녔다고 썼다. 그것은 자신이 보고 싸워야 할 고통과 괴물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거짓된 명랑함이 아니라 자신이 싸워 온 모든 괴물에게 승리한 신의 명랑함이었다. 다시 말해 몽테뉴는 인간이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과 삶이 얼마나 우리를 위협하고 미치게 만들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사랑했다.

🔖 니체는 이런 태도가 결국 우리의 심리를 산산조각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부를 신으로 숭배하려면 나머지 부분을 악마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만약 정말로 자신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냥 삶을 끝내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건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고, 소유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건 단순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니체에게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허무주의다. 허무주의자는 어떤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걸 무의미하게 여긴다. 우리는 삶이 중요하지 않게 될 때 살기를 그만둔다.

🔖 하지만 삶과 자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정체성도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인생을 바꿔 놓는 질병, 사랑과 출산 같은 인생의 비극과 황홀경이 닥치면, 자아는 산산이 부서지고 우리는 자아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항상 유동적이다. 때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절망 할 필요는 없다. 자아에 대한 인식은 약간 불안정한 편이 낫다. 인생을 살아가는 줄곧 자신이 누구인지 항상 정확히 안다면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평생에 걸쳐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또 알아가야 한다. 자아를 솔직하게 사랑한다는 건 자아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자아가 연약함을 느낄 때, 나쁜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 나쁜 감정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건 우리가 나쁜 감정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며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나쁜 감정을 없애려 하거나 밀어내려 하는 건 실수다. 우리에겐 나쁜 감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이 의미 있는 건 삶 속에 나쁜 감정이 함께해서다. 삶에 대한 애착은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바로 흙이다. 흙이 충분히 기름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흙에는 지렁이가 가득하다.

🔖 하지만 그것은 한 종류의 의미 있는 삶과 다른 종류의 의미 있는 삶을 맞바꾸는 게 아니라, 온전하고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그렇지 않은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감정 성인이 약속하는 행복한 평화는 이런 인간적인 삶을 희생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잘 살려면 아니 그저 살아가려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인간 세상에 완전히 몰입해 비극적인 일과 기쁜 일, 이상한 일, 평범한 일과 같은 인간사의 모든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나쁜 감정도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감정 성인은 나쁜 감정을 극복하는 동시에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건 취사선택을 허용하지 않는 일괄 거래다. 사소한 일에서 기쁨을 찾으면서, 사소한 일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수단이다. 당신은 삶을 소중히 여기며 정원의 지렁이를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덜 소중히 여기며 지렁이를 쫓아낼 것인가.

🔖 대부분의 야생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우리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는 당신이 무시당했거나 해를 입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분노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급하게 분노에 대한 결론을 내리거나 분노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