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보다도 이 “수고하셨습니다” 한마디 속에는 인간으로서 갈구하게 되는 질문의 대답이 일정 부분 담겨 있었다. 여러분과 내가 심장 박동수만큼 묻게 되는 질문. “나는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인간을 망망대해에서 날개를 다친 채 헤엄치는 바닷새라고 상상하곤 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그 가능성은 저마다의 이유로 꺾여버렸고 이제는 방정맞다 싶을 정도로 발을 놀리지 않으면 익사하고 마는 바다 위의 하얀 점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새는 오직 바로 저 질문들의 답을 얻을 수 있을 때만 발길질을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대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가라앉는다.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 그날 작은 도서관의 가장 인기 없는 코너 구석에서 느꼈던 것은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감각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곧잘 세상을 떠나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그 순간 내가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과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면서 느꼈던 감정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이었다.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관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 같다.

🔖 논픽션은 공동체의 투병기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육체의 상처와 고통뿐 아니라 세대와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을 고백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작가의 역할은 고름이 질질 흐르는 환부가 되는 것이다. 그가 쓸모없다고 확신하는 종류의 책은 끝까지 읽고 나서 작가의 결점을(글의 결점이 아니라)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이라면 차리리 쓰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 작가로서 정확해질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과 닭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