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노동은 심각하게 성별화되어 있다. 여자들은 직장이 아니어도 타인의 감정을 책임져야 하고, 그런 감정 관리는 직장에서도 일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 노동의 성 배분은 전반적인 사회 불평등을 반영한다. 타인에게 내 감정을 강요하는 일을 피하려고 내 감정을 관리하는 일은 스스로 종속적인 관계를 자처하는 격이다. 온종일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져야 한다면 정작 자기감정과 개인적 요구사항은 삼켜버리도록 길들여진다. 서비스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은 힘 없는 삶에서 습득한 능력이고, 결국 천부적인 권리로서 존경을 기대하는 힘 있는 자들이 그런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도움을 제공하는 일은 원래의 자선 개념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금 지원을 얻어내기가 쉽다. 반면 “소외된 사람들이 연대하여 힘을 얻는 일에 자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면 이미 힘을 가진 이들이 질색할 제안이 되어버린다. 비영리 단체들이 아직도 겪고 있는 갈등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의 수익금으로 지원받고 있지만, 그 체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 주고, 돌봐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없이는 존립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돌봄 활동으로 비영리 조직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가 잘 작동될 수 있도록 기름을 쳐준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을 멈추길 원한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부드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일을 그만해야 한다 는 뜻이다. 하지만 그 기름칠이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선택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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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 자금 지원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창업 지원을 받아 내는 사람들과 꽤 닮았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펀딩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인데다가, 요즘 대부분의 투자나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기술•금융 분야의 부호들이고 투자와 기부를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후원자들의 이러한 결과지향적 소비주의는 노동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야만 하는 압박이 된다. 그 결과는 후원자들에게는 괜찮은 ‘사업’이 되지만, 그 ‘사업’은 사회가 앓고 있는 나날이 곪아가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인 정도다.

🔖 여자들의 컴퓨터공학 과정 등록률은 1980년대 40퍼센트에서 현재 2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초창기에는 주로 컴퓨터 게임에 알맞게 제조된 개인용 컴퓨터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광고되고 판매되며 미래의 프그래머들은 남자들이라는 개념을 더 굳게 다져갔다. 대중문화도 이러한 흐름을 알아채고 백인 남자 컴퓨터 괴짜들을 영웅시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없다면 누구든 컴퓨터 능력이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성별 장벽과 함께 계층 장벽이 세워졌다. 과학기술 연구원 자넷 아바트에 따르면, 학교와 기업들은 ‘고등학교 컴퓨터 동아리 활동을 하는 10대 남자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컴퓨터적 인간상’에 맞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채용했다. 컴퓨터도 예술처럼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분야라는 사고는 여전했다. 여자들은 남을 돌보는 일에 재능이 있고 남자들은 고립되고 사회에서 동떨어진 천재성이 필요한 일들을 잘한다고들 믿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랑 노동자들 간의 균열은 더 명확해졌지만,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이 장시간 일하고 변덕스러운 회사를 견뎌내야 했다. 이러한 성 역할이 타고난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을 그 어떤 똑똑하다는 남자들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 쭈뼛쭈뼛 건네는 인사, 휴게실에서 나누는 잡담, 일과 관련 없는 이메일 주소로 온 다정한 편지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함께 얻는 이익이 명확해지고 우리가 함께 누릴 힘을 쌓아가는 방법이다. 노동계 금언인 ‘한 사람이 받은 상처는 모두의 상처다’를 굳게 믿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가 주장했듯, 우리는 철 지나면 버려지는 소모품보다 간직되고 소중히 여겨질 선물 같은 것들을 만들고, 사용하고, 뽐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일터 너머의 세상에서도 아름다운 것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 다. 인간적 소통에 좀 더 집중하면, 왜 우리가 다른지보다 왜 우리가 같은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역사가 테라 헌터가 <나의 자유를 즐기기 위해 Joy My Freedom>에서 묘사한 노예였다가 해방된 흑인 여성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스스로 열등한 인종이라는 생각을 뒤엎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신나게 만들던 모습을. 그들은 열심히 또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자신들이 누릴 자유가 의미를 갖게 될 공간도 요구했다. 헌터는 “흑인 여성들은 그 자유를 친구, 가족, 이웃과 함께 즐거움과 여유를 찾을 기회로 만드는 데 진심이었다.”고 썼다. 그들은 생계를 유지할 필요성과 “건강한 감정, 개인적 성장, 집단의 문화적 표현의 필요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
(…) 아직까지 자본주의 외의 세상이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자본주의 너머의 세상을 순간순간 마주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크 피셔가 말했듯, 우리가 가진 욕구들은 아직 대개 이름이 없다. “자본주의가 펼쳐놓은 무한한 반복에서 탈출한 미래를 보는 것이 우리의 욕구이다. 그 탈출은 새로운 인식, 욕구, 자각이 가능한 그런 미래에 달려 있다.” 지금 삶의 모든 면에서 그런 욕구들은 성취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욕구들이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키워나갈 토대이기도 하다.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그 충만함을 되찾으려면, 노동환경의 사소한 개선이나 대대적인 노동법 정비가 간절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충만함을 되찾은 후에는 우리 삶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우리 것’이라는 정치적 이해가 필요하다.
사회는 늘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가치 있게 여기는 그런 세계라도 더 많은 요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런 부담을 나눌 수 있고, 일을 더 유쾌하게 배분하고, 원한다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세상일 것 이다. 서로를 돌보는 일이 사회의 한 계층이나 성별이 떠넘긴 책임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돌볼 시간이 많은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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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노동으로부터 사랑을 구원하는 일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투쟁의 핵심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노동 관행에 구속받지 않고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실험해보기 위해 이미 공간들을 되찾아오고 있다. 실비아 페데리치는 플라톤을 상기하며 “사랑하는 사람들로 짜인 군대가 있다면 그 군대는 무적일 것이다.”라고 했고, “사랑은 개인주의를 막아주고 모두를 묶어준다.”며 우리가 우리를 넘어서게 되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서로 떼어놓기 위해 우리의 애정, 성생활, 신체를 통제해야만 했다. 자본주의가 사용한 가장 대단한 속임수는 노동이 우리의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우리를 설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