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아기들은 숫자를 받지 못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축하할 삶이 있었다. 「우리는 몇십 년 동안 슬픔에 빠져 살았어. 네가 태어나자 희망이 생겼지. 희망은 싸워야만 얻게 되는 거야. 하지만 희망이 환상으로 변하는 시점이 온단다. 그때가 아주 위험해. 그 모든 것이 사실을 어떻 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지.」 나중에 할머니가 말해 주었다. <471>은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이다.

(…) 나는 내 삶을 기적적인 모험담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니니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을 항상 부정했다. 할머니는 내 존재의 처음 몇 달을 매우 정확한 인과 관계를 따져 가며 회상했고, 따라서 그 이야기는 마치 과학 이론에 대한 분석처럼 들렸다. 그것은 다른 경로를 밟을 수도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묘사라기보다 자연법칙의 재구성이었다. 성공은 항상, 올바른 사람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희망이 정당해 보일 때 희망을 위해 싸우고, 희망과 환상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해석한 덕분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운명에 책임 이 있어. 〈약력〉은 네가 사는 세계의 한계를 아는 데에는 매우 중요하지만, 일단 그 한계를 알고 나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네 결정에 책임을 지게 되지.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을 거야. 승리에 우쭐 해지지 말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 네 엄마가 자주 설명했던 체스 말의 움직임처럼, 네가 규칙을 익혔다면 그 게임은 네가 하는 거야.」

🔖 우리가 정치관을 물려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고, 그때 가장 편리한 것이나 이해에 가장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옳게 느껴지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지. 하지만 우리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우리의 품위를 잃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품위는 돈이나 명예, 직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거든. 나는 예전의 나와 똑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여전히 위스키를 좋아하고.」 할머니는 이 모든 것을 차분히 말했다. 삶의 각 단계를 다음 단계와 뚜렷이 분리하고,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가끔 확인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내가 당신의 궤적을 기억하기를 원했고, 당신이 당신 삶의 저자임을 이해해 주기를 원했다. 도중에 맞닥뜨렸던 그 모든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당신의 운명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할머니는 책임지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란, 필연을 의식하는 거란다.」

🔖 어떤 면에서 나는 완전한 사이클을 돈 셈이다. 하나의 시스템이 한 번 바뀌는 것을 본 사람은 그것이 다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어렵지 않다. 냉소주의와 정치적 무관심과의 싸움은 일부에서 도덕적 의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바뀐다. 나에게 그것은 내가 빚졌다고 느끼는 과거의 모든 이에 대한 부채감에 가깝다. 그들은 무관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냉소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상황이 흘러 가도록 그냥 내버려둔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된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했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이며 그들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나의 세계는 부모님이 탈출하려고 애썼던 세계만큼이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두 세계 모두 그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두 세계의 실패는 독특한 형태를 띠었다.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분리된 채 남을 것이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쓴 이유는 그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투쟁과 화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