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네오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결여를 알리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발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가 알려주듯이 인간의 손가락뼈는 몸의 다른 뼈와는 달리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그의 손은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통증을 느끼게 할 것이고, 더 거대한 결여의 가능성을 상기하게 할 것이고, 스테파니에게 매번 다시 응답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몇몇 고비들을 특정한 어떤 사람을 상징적으로 살해하면서 통과한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의 시공간을 떠나올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인디아는 고향을 떠날 때 과속 운전으로 보안관을 유인해서 굳이 죽여야 했나. 기억을 봉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살인자이고 자발적 기억상실증자다. “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인디아의 이 말은 언뜻 무책임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충고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는 문장이라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