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사진들은 수송의 한 형태이며, 부재(不在)의 한 표현이다.
🔖 자본주의의 윤리에 따르면, 가난이란 개인이든 사회든 기업에 의해서 구제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기업은 생산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판단되며, 이 생산성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된다. 그래서 도망칠 수도 없는 감겨진 빈곤 상태로서의 저개발이란, 자본주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는 세계의 거의 절반을 그러한 상태에 묶어 두고 있다. 이론과 실제의 사이에 있는 이 같은 모순이야말로 왜 자본주의내 자본주의적인 문화제도가 이제는 더 이상 그들 자신이나 세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 저개발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강탈과 착취를 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인위적인 울혈 증상에 걸린 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저개발은 그냥 죽일 뿐만이 아니다. 그 치명적인 정체(停滯)는 삶을 부정하며 죽음을 닮아 있다. 그 이민은 살고 싶어한다.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그들은 자기들의 노동을 제공하러 온다. 그들의 노동력은 기성품이다. 이제부터 그 노동력 덕분에 생산에 이익을 얻게 될 공업화된 국가들은 그 노동력을 생성시키는 비용은 전혀 부담을 해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라 중병에 걸린 이민노동자나 너무 늙어서 일할 수 없게 된 이민노동자를 부양하는 경비 역시 부담하지 않는다. 도시화된 국가의 경제에 관한 한 이민노동자들은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태어나지도 않으며, 양육되지도 않으며, 나이 먹지도 않으며, 지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 하나의 기능 - 일하는 것을 가질 뿐이다. 그들의 삶의 다른 모든 기능들은 그들의 출신 국가의 책임이다. (…) 다경제학자들은 가끔 ‘자본 수출로서의 이민’ 이 생산의 다른 요소들의 수출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집계된 바로는, 한 이민노동자들의 양육, 그가 스무 살에 이르기까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그의 조국의 국민경제가 부담하는 액수가 약 2천 파운드에 이른다. 한 명 한 명의 이민이 도착할 때마다, 저개발된 경제권에서 개발된 경제권에 대해 그만한 액수를 희사하는 셈이다. 게다가 공업화된 나라가 차지하는 저축액은 또 훨씬 막대하다. 그곳의 좀더 높은 생활 수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의 조국에서 열여덟 살짜리 노동자를 생산해 내는 비용은 1인당 8천 파운드에서 1만6천 파운드는 된다. 이미 다른 곳에서 생산되어서 온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도시화된 국가가 매년 8백억 파운드 이상을 저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를 가진 자들에게, 인간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 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 보아야 한다. 잘 먹는 사람들은 못 먹는 사람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서툴게나마 남의 경험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그 세계를 분해해서 재조립해 봐야만 하는 것이다. 남들의 주관 속에 들어가느니 하는 얘기는 오해에 이를 여지가 있다. 남들의 주관이란 똑같은 외부적 사실들에 대해서 단순히 내부적인 태도만이 다른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 중심부에 놓여져 있는 사실들의 별자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
🔖 노동 조건과 생활 환경의 개선, 사회복지, 의회민주주의, 현대 기술문명의 이기 같은 것들은 과거의 비인간적인 것들이 우발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에 핵심적으로 인용되는 말들이다. 도시 중심지역에서는 그런 주장이 일반적으로 신봉되고 있다. 거기서는 착취의 가장 적나라한 형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지구 반대쪽 끝의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구 반대쪽’이라는 개념은 지리학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해당된다. 파리시 교외의 ‘판자촌’ 같은 것은 거기에 속한다. 지하실에 파묻혀서 잠 자고 있는 이민들도 거기에 속한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 ‘정상적’인 것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경우는 그 반대가 되는 행동, 즉 ‘비정상적’이며 극단적이거나 혁명적인 행동들을 통해서이다. 그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해서 그 정상성이 박탈되어 버리고 나면, 자신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느낌은 그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그가 소속되어 살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 전체로 확장되어 나간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가까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정상적’인 것들이 나 자신의 얼마만큼을 부정하거나 속박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 그가 만약 어떤 흐름, 자신의 자유의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어떤 조류를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특별히 차별하지 않고 ‘인생’으로만 생각한다. 이같이 전체를 보는 관조의 시각과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의 불가해함이 일종의 운명감을 지탱해 주며 특별한 지구력과 용기를 준다. 이건 그가 결코 저항하지 않으며 모든 불의를 감수할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설명보다는 비극 자체가 보다 더 실감이 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알지도 못하며 알려고 애써 보지도 않는 역사는 엄연히 거기 있다. 그 역사는 그의 상황의 일부분이며, 이미 그의 경험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의 한 부분이다. 그의 열등한 지위의 자연스러움 — 그가 사람들에 의해서, 기관들에 의해서, 대도시의 일상적인 생활 예법에 의해서, 기성품 구호나 주장들에 의해서, 너무도 쉽게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그 자연스러움 —은 그의 기능 그리고 그 기능에 따르는 열등한 지위가 새로운 것일 때 가장 완벽하고 즉각적인 것이 된다. 그는 애초부터 여기에 존재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