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인더를 보지 않고는 찍지 않죠?
그래요, 그건 기하학이에요. 위치를 일 밀리미터만 옮겨도 그 배열은 달라져 버려요.
지금 말하는 기하학은 일종의 미학을 말하나요?
전혀 다르다오. 내가 말하는 기하학은 하나의 이론을 논할 때의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적확함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적확하게 접근할수록 더욱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지요.
그런데 왜 기하학인가요?
황금분할 때문에 기하학을 말하는 거지요. 하지만 계산은 필요 없어요. 세잔이 말했듯,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 사진에서 고려되는 건 충일함과 간결함이라오.
테이블 위, 그의 손이 쉽게 미칠 자리에 작은 사진기가 놓여있다.
그림으로, 특히 데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진은 이십 년 전에 접었어요. 그가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에 대해 물어 와요. ‘사진가로서의 창의적 경력’ 에 내린 상을 몇 주 전에도 하나 받았지요. 그 사람들에게 말했죠, 나는 그런 경력을 믿지 않는다고. 사진은 적확한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 손가락을 누르는 일일 뿐이에요.
(…)
하나의 사진을 찍는 순간, 당신의 이른바 ‘결정적 순간’ 은 계산될 수도, 예고될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란 쉽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늘 사라져 버리지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일 초의 몇 분의 일인 그 순간을 어떻게 압니까.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와는 반대가 아닐까요. 사진은, 찍는 순간, 설혹 그 사진이 어떤 부분들로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라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순간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선생 자신의 모든 감각이 최대한으로 예민하게 가동된 상태, 다시 말해 일종의 제육의 감각 —제삼의 눈이라고 그가 거들었다— 으로부터 오나요, 아니면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인가요?
그는 낄낄 웃으며 —마치 동화 속 토끼가 웃는 것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몸을 옮기더니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게 바로 내 답이요.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지요.
거기에는 자신이 손으로 베껴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받아서 읽어 보았다. 1944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아내에게 부친 편지에서 인용한 글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연대감은 너무도 커서, 한 개인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죽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
그는 자신의 모성적 글씨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 육체는 여기서는, 유일한 부드러움이다. 애무를 생각나게 하는 유일한 재료다. 눈에 보이는 다른 모든 것은 날카로운 광물질로, 부서져 있고 비틀려 있다. 육제는 여기서, 조작된 단단한 금속으로 죄다 덮인 성상에서 겨우 드러나 있는 작은 채색 부분과도 같다. (성당마다 이런 성상을 볼 수 있다) 육체는 상처이며 동시에 치유다. 여기를 보게! 우리를 좀 봐! 늙은 여인은 선원에게 말했었다.
그리하여 원래 잔혹한 존재인 육체는, 미처 쾌락을 알기도 전에 잔혹함을 먼저 알아 버리는 것이다. 해서, 신학자나 철학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육체로부터 형이상학으로 기울어 간다. 이런 기울어짐에는 말이 필요치 않다. 그저 흘끗 한번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경(憧憬)의 전문가 들이다. 조금이라도 잔혹함이 덜한 삶, 그런 한 조각의 삶에 대한 기나긴 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묘하게도 이런 것들은 아름다움과 공존하면서 아름다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에서 약탈되어 지금 세계의 여러 박물관에 있는 조각들은 이상하리만치 비관능적이며, 바로 이런 사실에 의해 그 조각들이 그리스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예술에서의 관능은 육체와 자연의 연속성, 그 공모(共謀)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공모를 찾아볼 수가 없다. 고전적 조각가들이 찾아 마지않았던 저 이상적 조각상도 실상은 쓸쓸한 육체에 대한 위로에 다름 아니었다. 내게는 이제, 절제 속에서 끝없이 추구되던 동경이 그 모든 조각품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사천 년 전의 키클라테스 조각들은, 그 대리석이 부드럽고 잘 빚어질 듯이 보이도록, 무연(無緣)한 세상 한가운데의 벗은 남녀들이 마치 효모를 넣지 않은 빵덩이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밤이 내렸고 매미들이 소리를 높였다. 이런 일은 올해 처음이에요. 도대체 그칠 줄을 몰라요. 여름 내내 갈 것 같아요!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늘 애도할 겁니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 산 위의 양치기들, 아카시아 나무 아래의 남자들, 그리고 여기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우리를 위해 발언하는 작가 오디세우스 엘리티스는 그렇게 썼었다. “듣고 있나요, 당신? 천국에 홀로 있는 당신을 늘 애도할 겁니다.”
끝없는 동경.
23번 전차에서는 자리가 비면 언제나 위층 제일 뒷자리에 앉곤 했다. 거기서는 머리 위 전깃줄에서 흩어지는 스파크 소리를 들 을 수 있었다. 전차가 궤도를 따라가듯, 나는 거기 앉아 섬들과 태양 아래의 여인과 바다를 꿈꾸곤 했다. 그땐, 오디세우스 엘리티스의 놀라운 시들을 알지도 못했을 때였다.
”마침내 —날 미쳤다고 해도 좋아요— 우리의 천국이 근거 없는 것임을 내가 깨달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