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부들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노인들은 요양 시설 병실에 누워 자신의 것이 아니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몸에 절망한다. 장례에는 ‘엔딩 플래너’가 등장하게 되었다. A 패키지, B 패키지, C 패키지를 내밀며 세트 상품을 고르듯 장례를 준비하라고 한다.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 여자 상주는 일탈이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다. 관을 멜 필요가 어디서 오는지, 상주의 자리에 설 필요가 어디서 오는지. 필요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모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 가고 있는지다. 아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를 만든다. 다만 그 시작이 “요즘은 그렇게도 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거드는 장례지도사의 조언일 수도, “저는 여자가 아닌데요”라는 단호한 도발일 수도.

🔖 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순간에도 사회가 나를 잊지 않고 장례를 치러줄 거라는 믿음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연대감이죠. 위패 하나 드는 게 큰일은 아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계속 내는 거죠. 당신의 장례를 함께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혼자가 아니고 당신 혼자가 아니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인기척을 끊임없이 내는 거예요. 그 인기척이 저에겐 위패를 드는 거고요.

🔖 하지만 죽음 역시 사회적인 것이라, 애도는 사회의 규율과 질서 안에 존재한다. 누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국가적으로는 공적 지원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도 통치의 기술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도 권력이 행하는 일이다. 이 분류는 ‘죽음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말을 뒤집고 죽음의 위계를 만든다. 사회가 애도(의 비용)를 감수하지 않는 죽음이 생겨난다.* 가난한 이의 죽음, 시설에서 사는 이의 죽음, 사회가 ‘온전하다’고 보지 않는 몸을 지닌 이들의 죽음, 그리고 연고 없는 자의 죽음. 정례와 애도 절차가 생략되어도 괜찮다고 용인하는 죽음들이다.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없는 사람은 없다.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사람”만 있을 뿐이다. “어떤 주체는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다른 주체들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정하는 애도 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은, 누가 규범에 맞는 인간인가에 대해 특정한 배타적 관념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살아갈 수 있는 삶,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13쪽. (…) 앞서 언급한 민속학자 이도정은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죽음의 의미를 재해석했다. 그 죽음들은 ‘일탈’이 아닌 “일생 의례의 궤적에서 이탈할 수 있는 인간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내게 있어 죽은 자의 존엄은 그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 살았을 때나 죽었을 떄나 정상과 비정상, 쓸모와 무용, 질서와 이탈이라는 이분법 속에 삶이 익명화되거나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자신이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엄과는 무관한 일이다.

🔖 국가는 끊임없이 ‘가족생활’에 관여해왔다. 정확히는 가족 구성원들의 노동과 재생산(노동)을 통제했다. 돈을 버는 ‘가장 아버지’와 재생산과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어머니’라는 환상과 그 실질적 수행이 자본주의 ‘시장’을 떠받들고 있다. 그 시장은 비정형 노동에 종사하는 딸과 아내를 만들어 왔고,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자녀 세대’를 낳았다. 우리는 그 ‘가족’에 갇혔고, 그리하여 지하에 자리한 안치실에는 연고 있는 무연고 사망자가 홀로 썩어간다. 같은 건물 1층 빈소에서는 검정 상복 치마와 앞치마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육개장을 나르고, 완장을 찬 사람은 빈소 복도를 메운 화환 수를 헤아린다. 유골이 봉안당으로 옮겨갈 시엔 그 가족이 지급한 금액에 따라 가운줄에서부터 가장자리 끝줄까지 봉안 위치가 정해진다. 무연고 유골이 있을 자리는 지하다. 이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 지금의 ‘가족’이 있었다. 출산, 양육, 부양, 연명, 의료, 그리고 장례까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이 오직 (정상)가족 단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둔 사회는, 가족을 벗어나 구성원이 맺는 다양한 유대적 관계를 보려 하지 않는다. 무연고자가 증가한다.

🔖 애도(받을 자)의 자격을 묻는 세상에서,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애도의 위치에 놓은 것은 타인들이 보내는 안부 인사였다고 생각한다. 변희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변희수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사회적으로 애도할 죽음인가?”라는 질문에 자격이 아닌 연대와 관계로 답하는 법을 나는 그의 죽음 이후에 배웠다. 그건 어쩌면,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동지장이 아닐까 한다.

🔖 쪽방촌 주민이 이주노동자의 장례를 찾듯, 무연고자의 빈소에서 마을 독서 모임 회원들이 나타나듯, 그 행위가 우리를 우리로 만나게 할 거라 믿는다. 나는 내 죽음마저 선택하고 결정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그건 혼자 알아서, 어느 날 언제 갈지를 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준비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 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 살라는 말은 죽은 사람은 잊고 상처는 묻고 기억은 지우라는 말이 아니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갈 일을 생각해야 한다. 그건 내일 밥을 먹고 모레 잠을 자는 일이 아니다. 어떤 세상에서 살아갈 것 인가를 생각하는 일이다. 내 자식의 죽음 같은 일이 반복되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그 마음으로 산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한강 작가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이 답을 안다. 언제나 죽은 이는 산 자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