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안락하게 지낸다. 모르는 것, 미지의 것, 낯선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어긋나는 것을 만나는 일은 스트레스를 준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을 완전히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감당하고 처리할 방법을 찾게 된다. 모르는 것과 낯선 것을 알아가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바를 수정하거나 확장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신념이 더 단단해지고 구체화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은 반론에 자주 부딪혀야 해상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 세상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헛소리’를 눈앞에서 치우고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차단하는 일은 너무나 손쉽다. 기술이 구현한 개인화된 안전지대에는 바깥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다른 의견, 다른 존재에 대한 면역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각각의 의견이 위치한 맥락과 역사를 들을 기회는 점점 사라진다.
🔖 맞다. 세상엔 ‘다른 선택’이 아니라 ‘틀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양비론은 언제나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점점 더 그 ‘틀림’을 몰아세우고 조롱하는 방식만을 발달시켜 가는 것 같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의 오류를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류를 몰아 세울수록 악에 받쳐 극단적인 선택을 향해 움직이는데, 문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결국에는 그러한 선택이 만드는 세상을 모두가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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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사람’이 극소수라면 적당히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가 틀렸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져 비슷한 규모가 된다면, 우리는 극단의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최악의 세상을 떠안아야 한다. 지금 ‘틀린 사람’이란 표현 안에 계속해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면 잠시만 멈춰보자. 그 안에 나와 당신이 포함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
🔖 그리고 현실이 늘 훌륭한 철학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과 종교는 아름다운 당위를 제시하고 그 자체로 부응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정치의 언어는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입장과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며, 사람들이 거기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 때 비로소 청유하고 명령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당위와 별개로 움직이는 현실을 전제로 말하자면, 철학적 상상력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필요하다. 우리의 입장과 이해관 계가 서로 다를 때, 상상력은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된다. 정치의 언어가 사람들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입장과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면, 그 안에 무엇이 있고 그것이 어떤 모양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상상력이 필요하다. 비록 거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라는 표현은 과장이지만, 아예 모르고 덤비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다. 설득과 대화가 도무지 불가능한 저 먼 곳의 사람들에게는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펙트럼상의 어딘가에 서성이는 이들과 마주할 때는 더욱 지피지기가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상상력은 희소한 재능이다. 내가 있는 힘껏 상상해 본다고 한들,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이 품고 있는 진실에 얼마나 가까이 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결국은 직접 들어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듣고 있으면 열불이 뻗치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말이라도 말이다.
🔖 우리가 서로의 고유한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이야기와 예술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