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의 기대치는 엄마 역할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능할수록 더 보이지 말아야 했다. 몇 달 뒤 아기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나는 며칠 동안 회사에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후 마른에게, 업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지나가듯 언급했을 뿐이다.
‘아이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조직 문화는 ‘진정한 당신의 모습, 그대로 일하라’던 페이스북의 기운찬 슬로건과는 정반대였다.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해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는 셰릴의 《린 인》 이야기들과도 마찬가지였다. 페이스북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과 실제로 행하는 부분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고, 특히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예를 들면, 페이스북은 한때 프로젝트 패밀리라는 코드명으로 어린이용 페이스북의 출시를 계획했다. 세릴은 때때로 정책팀 사람들에게, 기회가 있었을 때 이걸 해내지 못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아이들을 페이스북에 끌어들일 기회를 놓쳤다고 책망했다. 하지만 어린 자녀를 둔 페이스북의 다른 리더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자녀들의 스크린 이용을 극도로 제한했다. 소설 미디어 계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 사진을 소설미디어에 올린 적도 없었다. 실리콘밸리는 집집마다 나무로 만든 몬테소리 장난감이 넘쳐났고, 전면적인 스크린 금지 규칙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사에서 부모들은 10대 자녀에게 휴대전화를 허용치 않는다고 떠벌리곤 했는데 이는 이들이 자사 제품의 위험성, 특히 어린 두뇌에 가하는 실질적인 피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
셰릴의 이너 서클에 속한 여성들의 영상도 상영되었다. 모두 백인인 그들은 아름다운 조명으로 연출된 화면 속에서, 궁전 같은 저택의 개인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사진발 잘 받는 아이들과 놀고, 묵묵히 지지해주 는 남편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모든 모성 우화는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노동의 대부분을 떠맡는 수많은 보모와 각종 도우미의 역할을 교묘한 편집으로 지워놓았다. 엄마 흉내만 내는 것이었지, 엄마 역할은 아니었다.
그들은 ‘워라밸’을 유지할 수 있는 진짜 비결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연봉이 뒷받침할 때나 가능한 현실이었다.
🔖 공식 입장과는 달리, 페이스북은 자사의 연구와 모델, 프로그램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용자 참여도를 극대화하도록 설계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회사는 특히 젊은 사용자들의 취약성을 파고들도록 맞춤 설계된, 일련의 중독을 유도하는 기능들을 도입하면서도 그 위험성과 유해성을 감춰왔다. 참여도를 끌어올리고, 그 참여를 중독으로 몰아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강력한 알고리즘이,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커져 결국 회사의 수익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약화될 가능성도 있었다. “움직이는 벡터 공간의 매핑”이라는 제목의 내부 메모에서, 페이스북의 CTO 앤드루 보즈워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참여도를 극대화한다는 회사의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최고경영진에 촉구했다. 그는 그 전략이 무책임하게 행동 방식을 유도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부정적인 행동 방식도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페이스북이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우리(페이스북)가 곧 세상의 기류를 만들어낸다. (…) 하지만 최근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는 콘텐츠가 기존의 선호에 반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의 선호를 강화하거나 형성하기까지 한다는 점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람들을 군집화하고, 서로 다른 지점들의 연결 가능성을 너무 이른 시점에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 우리는 너무 이른 시점에 최적화를 해왔고, 국소적 최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최적화를 조금 완화하는 것이다. 이용 시간과 참여도에서 일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더 많은 탐색이 가능하도록 흐름을 열어줘야 한다.
보즈워스는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진이 회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최적화와 몰아가기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콘텐츠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과 선택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여기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대두한다. 페이스북이 애초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미얀마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나는 이후 미얀마에서 벌어진 일과 페이스북의 공모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했다. 그것은 거창한 비전 때문도, 무슬림에 대한 특별한 악의 때문도 아니었다.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그저 조엘과 엘리엇, 셰릴, 마크가 쥐뿔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엘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시리아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는 손을 휘저으며 “그냥 폭탄이나 떨어뜨리라고 해. 난 상관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농담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지역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미얀마는? 그곳 사람들 역시 그에게 개뿔도 의미가 없었다. 그냥 신경 쓰기 싫다는 것이었다. 그 이상의 어떤 원칙도 제시된 적이 없었다. 대기업 밖의 사람들은 때로 이런 결정들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궁금해하고, 나름대로 추측도 한다. 페이스북에서는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조엘만이 아니었다. 엘리엇, 셰릴, 마크 등 최고경영진의 누구도 미얀마나 다른 나라를 위해 필요한 시스템을 구축할 만큼 이 사안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명 무관심해 보였다. 이는 부작위의 죄였다.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이 초래한.
🔖 내가 마크와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던 초창기에 사람들은 이 플랫폼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진심 어린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 그 모든 것이 유망하고 거대해 보였으며, 때로는 실로 역사적인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최악의 측면에 사로잡혀 있다. 그로 인한 슬픔과 상실감에.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 중 일부가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페이스북이 돕고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을 서로 등 돌리게 만드는 데 놀라울 만큼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규모로 사람들을 감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에게는 (사회의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무엇을 말하는지 직접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에.
정말로 이렇게까지 될 필요는 없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거대한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사람들을 7년간 지켜보며 가장 크게 깨우친 사실은 한마디로, 다른 선택이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르게 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의 파괴적 측면 대부분 을 바로잡을 기회가 중요한 분기점마다 있었다. 중국, 미얀마, 선거. 혐오 발언, 취약한 청소년 문제 등과 관련해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다시 바로잡을 수도 있었다. 다른 길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비즈니스로서의 페이스북, 브랜드로서의 페이스북, 기업으로서의 페이스북 모두가 더 나아졌을 것이다. 우리 모두 더 나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상사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 깊고도 맹목적으로 무관심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매 분기점에서 그들은 그것을 부추겼다. 중국에서는 정부의 주문에 맞춰 검열용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 미국에서는 직원을 파견해 허위 정보, 트롤링, 거짓말로 선거전을 치러 트럼프가 이기도록 도왔다. 미얀마에서는 끔찍한 성폭력과 집단학살을 조장할 수도 있는 게시물들이 그대로 퍼지도록 방치했다. 치명적인 무심함이었다. 그것이 이 회사의 실체였고, 나는 그 일부였다. 나는 그것을 바꾸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책임은 끝까지 짊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페이스북 같은 막대한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책임감을 갖추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마크와 페이스북 경영진은 더욱 개의치 않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그들이 초래한 지속적인 고통을 바로잡기는커녕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더 부자가 되는 일은 기꺼워하면서 그 외의 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거칠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들은 냉혹하고 비열한 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문제를 바로잡으면서도 충분히 부유하고 막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랬다. 자금은 넘쳐났다. 옳은 일을 할 여력이 충분했다.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고,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신, 졸업식 연설과 허영심 가득한 정치 행보, 휴양지 부동산, 마카다미아를 먹여 키운 와규 소고기 같은 것에 집중했다. 그때그때의 새로운 장난감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 이런 결정들, 이런 도덕적 타협들이 그들에게는 그다지 중대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그 일들로 밤잠을 설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의 일상일 뿐이었다.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