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논의가 성장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든 데 대해 경제학자들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과 데이터 중 어느 것도 1인당 GDP를 최대한으로 높이는 게 반드시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 경제학자들은 자원이 재분배될 수 있으며 재분배되리라고 믿고서 전체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만 온 관심을 집중하는 덫에 빠져 있다. 이것은 최근 몇십 년간 이루어진 연구와 경험이 말해 주는 바와 상충한다.
🔖 궁극적으로 핵심은 GDP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잊지 않는 것이다. 물론 GDP는 유용한 수단이다. 특히 GDP를 높이는 것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임금을 올리고, 정부 재정을 풍부하게 해서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잘 펼 수 있게 해 준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GDP 자체 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특히 가장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질은 물질적인 소 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실패작이라고 여겨지면, 또 가족이 자신을 실패작으로 여긴다고 느껴지면 괴로워한다. ‘더 나은 삶’이 어느 정도까지는 ‘더 많은 소비’를 의 미하긴 하지만,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부모의 건강, 자녀의 교육,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원한 다. GDP의 증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이는 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늘 가장 좋은 수단인 것도 아니다. 사실 같은 중위소득국 사이에서도 삶의 질은 막대하게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스리랑카는 1인당 GDP가 과테말라 수준이지만 모성 사망률, 영아 사망률, 유아 사망률이 훨씬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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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숙련, 기업가 정신, 건강 등 빈곤과 싸우는 데 지렛대가 되는 다른 영역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핵심적인 문제들에 집중해야 하고, 그 문제들을 다루는 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돈을 쓰는 것 자체만으로 교육이나 건강의 진정한 향상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우리가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하면 향상을 일굴 수 있을지를 꽤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규정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의 커다란 장점은 측정 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고, 따라서 정책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 봄으로써, 우리는 잘 작동하지 않는 정책을 버리고 잠재력이 있는 정책을 향상시킬 수 있다.
🔖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세율의 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다. 자신이 받는 돈이 노력을 들여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은 아무런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채로 스스로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인센티브’ 개념 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이러한 서사를 퍼트리고 정당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경제학자 상당수가 (전체적으로 세율을 더 높이는 데는 반대하지 않더라도) CEO들이 받는 엄청나게 높은 보수에 우호적인 태 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서사는 계속 확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명백히 분노하면서도 자원이 꼭대기 쪽으로 점점 더 많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기보다 이민자와 자유 무역을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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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면, 매우 높은 소득 구간에만 적용되는 최고소득 세율을 크게 높이는 것은 꼭대기 쪽에서 불평등이 폭발적 으로 증가하는 것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세율이 터무니없이 높은 것도 아닐 것이다. 어차피 최고소득세율의 적용을 받게 될 사람은 매우 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CEO의 보수가 줄면 그들은 더 이상 최고세율의 적용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본 모든 실증 근거로 유추해 볼 때, 높은 최고세율은 누구에게서도 최선을 다해 일하려는 의욕을 저하시키지 않는다. 또 만약에 높은 최고세율이 사람들의 직업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쪽으로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불평등 증가에 미친 영향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경제의 구조적인 변화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고, 1퍼센트 가 아닌 99퍼센트 사이에서도 불평등이 증가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세 등의 정책적 접근 외에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울트라 슈퍼 리치를 없애는 것은 어쨌든 좋은 출발점일 것이다(최고세율을 크게 높이면 울트라 슈퍼 리치는 말 그대로 ‘없어지게’ 될 텐데, 혹시 그래서 그들이 안쓰러우시거든 그들이 ‘울트라 슈퍼 리치’에서 ‘슈퍼 리치’가 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시기 바란다).
🔖 믿었던 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적은 기회만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될 때도 이와 비슷한 악순환 고리가 작동한다. 위에서 언급한 연구에서처럼, 사람들은 정부에 더 분노하게 될 것이고 정부가 그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을 더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째, 레이건-대처 혁명의 뿌리에 있는 성장 집착증, 그리고 그 이후의 어떤 대통령도 레이건-대처식 성장주의를 완화하기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것은 영구적인 피해를 야기했다. 경제 성장의 이득이 대체로 소수의 지배층에게로만 들어가면서 성장은 사회의 번영이 아니라 사회적 재앙을 낳는 기제가 되었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통렬하게 경험하고 있듯이 말이다. 전에 우리는 ‘성장’을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홍보되는 정책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허풍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의혜택이 극소수에게만 돌아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책이 효과가 있을 가능성을 오히려 더 두려워해야 할지 모른다.
두 번째 함의는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이 극심한 불평등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지금 당장 펴지 않는다면,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어 나갈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영구히 훼손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효과적인 사회 정책을 고안하고 그러한 정책에 충분한 예산을 지원하는 일이 지금 너무나 긴요하다는 의미다.